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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럽

스피노자

bravebird 2017. 5. 6. 11:00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도시, 암스테르담》이라는 책을 재밌게 읽었는데 스피노자 부분이 좋아서 한번 더 봤다. 원래 스피노자가 네덜란드 사람인지도 몰랐고 무슨 주장을 펼친 철학자인지도 전혀 몰랐는데 알고 보니 암스테르담과 자유주의와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심지어 직접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철학 굉장히 머리아파함) 매력적인 주장을 펼친 사상가였다. 




스피노자의 조상은 이베리아 반도 출신 유대인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성씨가 스페인 느낌이다. 1300년대에 에스파냐 카톨릭 교회가 강제개종 정책을 시행하면서 겉으로는 카톨릭, 속으로는 유대교를 믿는 크립토 유대인(Crypto-Jew)늘어났다. 이후 1492년도에 에스파냐 왕국이 그라나다 왕국을 함락시키면서 이슬람 세력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쫓겨났 이때 유대인도 대이동을 해야 했다. 유대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세파라드(Sepharad)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곳 출신 유대인은 세파르디 유대인(Sephardi Jew)이라고 했다. 마침 에스파냐를 상대로 80년간의 독립 전쟁 중이었던 네덜란드 공화국이 세파르디 유대인의 피난처였다. 암스테르담은 공개 예배를 보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유대인의 정착을 허락했고, 1615년에는 전국 의회가 유대교를 국가적으로 공식 승인했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상업에 능한 유대인들이 점점 유입됐다. 스피노자 가족도 세파르디 유대인으로, 집에서는 포르투갈어, 학교에서는 에스파냐어, 예배를 보고 토라를 읽을 때는 히브리어, 길거리에서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했다. 


스피노자는 이런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고 자란 근대 자유주의 사상가다. 《신학정치론》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도 정교 분리를 주장했다. 정치의 바탕은 인간 개개인의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고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성경이 역사 기록에 불과하기 때문에 믿음과 미신은 엄격히 분리해야 하며, 종교가 과학 탐구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유대교의 선민사상과 종교의 제도권적 성격도 신랄하게 비판했으며 이 때문에 끝내 유대교 공동체에서 제명됐. 신을 창조자로 보는 관점에 대해서는 신을 억지로 인격화하여 격하시키는 것이라고 았다. 스피노자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신 안에 있으며 아무 것도 신 없이 존재하거나 생겨날 수 없다'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소. 인간의 운명이나 행동에 개입하는 신이 아닌, 만물의 조화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는 신 말이오.'


스피노자는 심지어 가업을 물려받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자유무역을 지지했으며 상업도시 암스테르담의 활력과 번영을 찬양했다. 


암스테르담은 다른 도시 주민들의 선망을 한껏 받으며, 영글 대로 영근 이 자유의 열매를 실컷 수확하고 있다. 이렇게 번영의 절정에 이른 국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이 도시에서 사람들은 국적과 종교를 막론하고 서로와 더없이 조화를 이뤄가며 살고 있고, 같은 시민에게, 그가 부자이건 가난하건, 또 평소에 그가 정직하게 굴었건 그 반대였건 개의치 않고,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상품의 거래를 맡긴다.


자유주의와 관용의 가치에 대한 스피노자의 메시지는 웅변적이다.


모두가 자유롭게 구속받지 않고 판단하고

모두가 양심에 따라 신을 섬길 수 있으며

다른 귀하고 소중한 것들보다 자유를 더 우선시하는

그런 공화국에 사는 흔치 않은 행복을 누리고 있음을 깨닫고 나서부터

나는 그런 자유가 공공의 평화를 침해하지 않고도 허락될 수 있음을, 

그러나 동시에 그런 자유 없이는 신앙심이 꽃필 수 없고

공공의 평화 또한 안착될 수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 데

결코 보람 없고 무익한 작업이란 없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공화국에 사는 흔치 않은 행복을 나도 누리고 있다. 지난 몇 달간 홍콩의 막장 선거제도를 뜯었더니 여기 앉아서 누리는 선거권, 피선거권, 공무담임권 이거 정말 엄청나게 감사한 일이라는 거 깨달았다. 내 손으로 대표자를 고를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 직접 통치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0.0000000000000001%라도 있는 것과 아예 원천 차단된 것, 이 한끗 차이가 시민과 신민을 가른다. 회사에 있다 보면 헬조선의 답없는 군대문화가 답답해서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서 문화적인 진공상태에 있고 싶다는 생각도 자주 하지만, 여기가 아니면 대체 어디서 완전한 권리를 다 가진 시민으로 주인이 되어 살 수 있을까 싶다어디에든 내놓을 수 있을 만한 민주주의 역사를 가진 나라의 시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기도 하고, 나도 정신줄 꽉 붙잡고 여기 딱 버텨서 누구든 헛짓 못하도록 눈 부릅뜨고 있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으 갑자기 진지해졌으니 빨리 끝내야겠다. 머리아파도 잘 살펴고 9일날 투표 잘 해야겠고, 이 책에서 이거 난가? 하면서 기분좋게 읽은 부분으로 맺어 버려야지.


해질 무렵 딸 애나의 방이었던 다락방의 조그만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꼭 내가 17세기 후반 암스테르담의 평범한 시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중요한 인물은 못 될지 모르나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끼고 그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 노력하면 혼자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 따뜻하게 부른 배와 조금 전에 마신 맥주 한 잔에 기분 좋게 취한 머리로 세계를 나에게 배달해준 집 앞 운하의 수면에서 반짝거리는 얀 판 데르 헤이던의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행복해할 줄 아는 암스테르담의 시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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