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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럽

암스테르담 초읽기

bravebird 2017. 5. 4. 00:19

올해 7월에는 아주 친한 친구랑 암스테르담+헬싱키 간다. 도시 하나씩 골랐는데 나는 헬싱키, 언니는 암스테르담을 골랐지만 사실 암스테르담은 따로 가보려고 했을 만큼 굉장히 궁금했던 곳이다. 지금껏 모든 유럽 도시는 흩어져 있는 실크로드 문화재를 보려고 간 거였고 헬싱키도 마찬가지인데, 암스테르담은 순전히 그 자체 때문에 가볼 생각이었다. 




암스테르담 내지는 네덜란드가 왜 궁금했는가? 이유는 무수하다. 


자유주의 국가. 경제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가 융합된 곳이다. 네덜란드는 해양팽창 시대를 주름잡았던 초기 자본주의 상업대국으로 지금까지도 상업과 금융의 중심지다. 동시에 사회자본이 풍부한 복지국가다. 한국은 전쟁으로 다같이 망하고 출발한 쁘띠부르주아의 나라로 평등주의가 지배적인 곳이다. 그런 곳에서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정면 대립만 주로 보아온 나로서는 두 가지 전부 잡은 듯한 네덜란드가 정말 신기하다. 사실 이 두 가지 일망타진이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못해봤다. 유럽 복지국가 하면 독일이나 스웨덴식 사회민주주의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은 아직까지는 확실히 평등주의가 지배적인 곳이다.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픈 나라다. 니가 이만큼 살면 나도 최소한 그만큼은 살아야 되고, 노력하면 그게 가능했다. 지금이야 세태가 많이 달라지고 있지만 우리 부모님 같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바로 이 평등주의로 똘똘 뭉쳐 맨땅에 헤딩해서 잘 사는 나라를 만든 장본인이다나도 자유보다는 평등 쪽 이념에 좀더 치우쳐 있다. 업계 생태계를 해치는 회사에 다니고 있으며, 윗단계 회사에서 당한 갑질을 하도급 업체에 전가해야 하는 괴로운 입장이기 때문에 대기업 규제에 매우 찬성하는 편이다. 여성 노동자 정체성이 강하기 때문에 노동과 복지 이슈에 대해서도 획기적인 개선을 원한다정치성향 테스트를 해보면 확연히 진보 쪽이다. (중앙일보 소름돋게 잘맞는 정치성향 테스트 - 2017년 5월 3일 현재 2.89점 - 북한이나 외교 문제는 주로 중도보수, 경제 이슈는 중도진보, 사상과 표현 쪽은 진보 쪽으로 답변한 결과)


이런 내가 오히려 회사원 생활을 시작한 후로 평등의 한계를 매일 목도한다. 사원은 전부 똑같은 일을 한다고 가정하고 거의 똑같은 월급을 받으며 보통 3~5년마다 진급을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사람들마다 퍼포먼스가 천차만별이다. 유능한 사원 대리가 과차장 일을 다 하고 과차장은 가만히 앉아 연봉을 2배 받아가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하지만 그 사원 대리는 과차장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로 절대 그들을 추월할 수 없다. 어떻게 일해도 어차피 같은 월급 받고 나이 순서대로 진급할 거면 펑크 안 낼 정도로 적당히 일하며 회식 가서 상사에게 할리우드 액션이나 하는 게 제일 합리적이다. 이런 집단농장 혹은 중세 장원 같은 체제(실제로 많은 직원들이 봉건제 이야기를 함)에서는 그냥 다 고만고만해진다는 위기의식이 있다. 차등적인 인센티브가 확실하고 일의 결과가 확실히 내 것이 된다는 보장이 있으면 훨씬 집중할 텐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옛날에는 사업을 도대체 왜 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왜 자기 사업을 왜 그렇게 원하는지도 이해가 된다. 물론 후지쯔 성과주의 리포트》 같은 사례를 통해서 성과주의의 한계를 매우 극명하게 인지하고 있고, 나도 능력이 모자란 범인인지라 얄짤없는 자본주의 정글에 가면 한국식 평등주의를 사무치게 그리워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결과의 평등을 억지로 맞춰버릴 거면서 무보수 야근과 회식과 충성을 강조하는 체제에서는 열심히 움직일 동기가 정말 없다. 


회사생활을 하면서 의외로 자유를 점점 원하게 된 평등주의자로서, 자유와 평등은 항상 상충 관계인 줄만 알았다. 게다가 금수저 흙수저 하는 양극화 문제도 점점 심각해지고 있는 판국이니까.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선에서) 두 마리 토끼를 성공적으로 잡은 네덜란드의 사례가 많이 궁금하다. 네덜란드는 지대가 해수면보다 낮아서 항상 물과 싸워야 했다. 간척 사업은 거대한 과업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힘을 합쳐야 했고, 그렇게 해서 얻은 땅은 교회나 군주에 예속되는 것이 아니라 주민 소유였다. 주민들이 자유롭게 사고 팔거나 빌려줄 수 있었다. 이런 토대 위에 해양 개척과 무역 제패가 가능했다. 계약과 거래와 경쟁을 위해서는 개개인이 평등해야 했다. 효율적인 상거래를 위해서 실용주의도 발달했다. 이것이 '차이를 눈감아 주는' 관용을 가능하게 했고, 이 관용을 통해 쌓은 사회자본으로 세계 최고 수준의 복지 제도를 발전시켰다.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 네덜란드는 사회적 결속과 개인주의, 경제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 자유와 평등이 같이 가는 신기한 나라다.


네덜란드에는 성매매가 허용되어 있어서 궁금하다. 성매매에 대해서는 옛날부터 입장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에 법학, 사회학, 철학 가리지 않고 수업을 들으며 고민해 보았지만 아직도 도저히 정리하지 못했다. (2015/09/07 - [역사·시사] - 성의 철학과 성윤리 수업 회고) 아직도 질문만 무성하다. 


이성의 영역에서 나오는 질문들

- 왜 다른 모든 서비스는 사고 파는데 성매매는 금기인가? 거의 성역으로 여겨지는 모성 서비스(육, 난자제공, 심지어 대리모 서비스까지)도 사고 파는 마당에?  

- 연예인들은 성적인 이미지를 마음껏 판매하는데 왜 성판매는 금기시되나?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 

- 성적인 매력과 능력도 희소 가치기 때문에 수요와 공급이 있어 자연스럽게 거래가 성립하고 실제로 옛날부터 거래가 있어 왔는데 무조건 막으려는 건 무리수 아닐까? 만약 포주와 성판매자 간에 인신매매나 감금 같은 강제적 관계가 있다면야 절대로 막아야 할 사회악이지만, 구매자와 판매자 사이에 자유계약을 하는 거라면 뭐가 문제인가? 장기매매처럼 사람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일도 아니고 구매자와 판매자 서로 윈윈인데?  

- 성판매 여성들이 왜 자발성이 없고 억압되었다고만 가정하나? 그거야말로 여성 억압 아닌가? 

- 남:구매자=여:판매자 구도만이 지배적인 거래 양태라면 성별 불평등이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그 구도 자체가 불평등을 낳을 것이다. 하지만 남녀 모두가 성 구매와 판매자가 된다면 해방일 수도 있지 않은가?   

- 성을 왜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야만 하나? 반드시 사랑과 결부시켜야만 하나? 성적 엄숙주의는 이 시대에 고루하지 않은가? 

- 성적으로 정말 소외된 사람들은 어떻게 성을 누려야 하나? 구매라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 성판매 여성들을 무조건 족치면 그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고 살아야 되나? 가뜩이나 편견이 많아서 사회에서 잘 받아주지도 않는데? 요즘이야 세태가 많이 달라지고 있긴 하지만 특히 예전에는 정말 찢어지게 가난하고 교육도 못 받았는데 인신매매까지 당해서 어쩔 수 없이 성매매의 길로 접어든 사람도 많았는데. (미아리 포청천으로 유명했다가 성매매특별법 위헌+성판매여성 지지 입장으로 선회한 김강자 전 총경의 입장 참조)


감정의 영역에서 나오는 질문들

- 왜 나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왜 절대로 성매매만은 하기 싫은가?  

왜 나는 성매매 하는 사람을 인간 말종 보듯이 하는가? 왜 그런사람 친구나 부하노릇하기 싫은가?

- 성판매자와 과연 친구로 지낼 수 있을까? 


감정적으로는 성매매에 절대 반대한다. 나 스스로 사고 싶지도 팔고 싶지도 않고, 성 판매자든 구매자든 일정 수준 이상의 가까운 관계로 지내기에 영 찜찜하다. 가족이나 친구가 관여되면 정말로 크게 실망할 것이다. 동료가 관여되면 비즈니스적 공존은 가능하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개인적 관계를 형성하기 꺼려진다. 하지만 내가 싫다고 해서 사회에서도 쓸어없애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다. 감정적으로는 수용할 수 없지만, 왜 그른 일인지 논박하지 못하겠다. 게다가 나는 전반적으로 성에 관련된 이슈에 대해서는 엄숙주의보다는 개방이 낫다는 입장이다. (현재 논점인 성매매와는 관계 없어서 회색 처리하는데, 엄숙주의<개방 입장에 대해서 예를 들어 부연하려 한다. 예를 들면, 이희은닷컴 사장 이희은일침 등을 지지한다.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있는 글이긴 하나 크게 성적 엄숙주의 반대, 개방 지지의 메시지로 이해하고 있다. 대대적인 광고와 노출로 clickbait하는 이희은닷컴의 마케팅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그건 내가 사업가 입장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과는 별개로 가끔씩 접하는 이희은 씨의 일침은 정말 명문이다. 이희은 씨는 정말 능력있고 똑똑한 사업가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성매매에 대해서만은 거부감이 남아있다. 이런 모순 때문에 아직도 성매매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정리하진 못했다. 네덜란드에서는 이 성매매 이슈에 대해 어떤 고민을 거쳐 어떻게 하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좀 알아두면 좋을 것 같다. 성매매뿐 아니라 마약, 안락사, 불법점거(squatting) 등등 다른 나라에서 금지하는 수많은 것들을 눈감아 주는 헤도헌(gedogen) 자체의 배경과 구체적인 시행 내용도 관심이 간다.


암스테르담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함께 손꼽히는 대표적인 운하 도시다. 표트르 대제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후에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네 번 갔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모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암스테르담은 빼놓을 수 없다. 


네덜란드는 제국을 경영했고 해양팽창의 선두주자였다. 식민지 경험이 있는 아시아 여러 지역의 역사, 정체성 문제, 향후 진로 같은 것에 강렬한 호기심을 느끼는데, 정작 제국 경영자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다. 중국 서북 변경과 홍콩에 관심을 갖다 보니 영국과 러시아 정도까지는 눈길이 뻗쳤는데, 나머지 제국주의 국가에는 아직 닿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제국주의 국가 중에 본국의 사이즈가 굉장히 작은 편인데도 해상 활동이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유구한 전통을 가진 농부와 선비의 나라(지금까지도 대체로 여전하다고 생각한다)에 살고 있기 때문에 자본가들이 주류가 되어 만든 상업 국가는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함이 있다. 일본과의 교류 부분재미나다. 일본 여러 도시 중에 나가사키가 가장 가보고 싶기 때문에 네덜란드를 미리 가서 뭐라도 봐두면 좋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지극히 실용주의적인 나라다.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요점만 확실히 말한다고 한다. 하도 합리와 실용성을 제1가치로 두고 살다 보니 사람들이 패션에 관심도 없는 편이라고 한다. 상당히 호감 가는 국민성이다.


이번 암스테르담 여행 가는 김에 살펴볼 만한 키워드들이 매우 많고 흥미롭다. 경제적 자유주의, 사회적 자유주의, 스피노자, 종교개혁, 칼뱅주의, 재세례파(Mennonites), 오라녜 대공, 펠리페 2세, 동인도회사, 성매매, 알레타 야콥스(Aletta Jacobs), 뉴암스테르담(뉴욕), 안네 프랑크, 헤도헌, 관용, 실용주의, 렘브란트, 반 고흐, 난학, 나가사키. 아 또 능력치 이상으로 욕심이 도짐. 헤르미온느의 모래시계 하나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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