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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럽

뜬금없지만 베를린

bravebird 2017. 4. 25. 23:26

뜬금없이 지금 와서 베를린 이야기 하기. 


2015년 8월에 베를린을 갔다왔는데 뭔가 남겨놓지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유럽에 희한하게 관심이 별로 없고 거의 모르는 편이다. 지금까지 다닌 유럽 도시는 전부 중국 약탈문화재 보러 간 것. 베를린이 처음 가본 유럽 도시였다. 유럽 중에서도 라틴 계통보다는 게르만/노르만 계통에 끌리는데다가 (왠지 좀 친숙함;; ㅋㅋㅋ) 베를린에 친한 친구도 있다. 특히 베를린 달렘 미술관은 《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아주 괜찮은 약탈 컬렉션이 있는 곳으로 소개가 돼 있었다. 첫 유럽여행으로 베를린이 아주 제격이었다. 




숙소가 있었던 미테 거리에 있는 유명한 그라피티. 베를린은 생각보다 스카이라인이 낮고 건물이 오래된 소탈한 도시였는데 펑키한 그라피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독일에서 제일 가난한 도시로 대학생들과 젊은이들과 독립 예술가들의 도시였음. 물가도 다른 도시에 비해 저렴한 편이고 월세 가격도 들어보니 충분히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진심으로 독일 이주 고민함. 딱 2주동안. ㅋㅋ







박물관 투어 간 거기 때문에 박물관섬이랑 아주 가까운 숙소를 잡았었다. 도착한 날은 아마 금요일인가 토요일 저녁이었는데 석양이 진 강변을 지나 10분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박물관섬에 도착했다. 루스트가르텐과 베를린 돔이 있었다. 머무르는 내내 날씨도 참 좋았었다.







곳곳에 남은 베를린 장벽의 흔적. 첫 번째는 둘째날 아침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 가는 길에 우연히 지나쳤다. 두 번째 지점은 체크포인트 찰리에서 가까운 토포그래피 오브 테러. 세네 번째 지점은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 중에 제일 유명한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마지막 짤은 브레즈네프와 호네커의 키스 장면으로 베를린 장벽에 그려진 그라피티 중에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저 키스 장면은 2012년도 중국 신장 우루무치를 여행할 때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모니카와 함께 구경했다. 모니카는 투르크어를 연구하는 독일인 언어학자인데 당시 투바 공화국으로 현지조사를 가는 길에 우루무치에서 춘절연휴 혹한기를 넘기고 있었다. 열여섯에 아이 엄마가 되고도 돈벌면서 애 키워놓은 다음 대학에 가서 지금은 연구자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런 씩씩한 삶도 있을 수 있구나 싶다. 앞으로 뭐하고 살지 고민만 많았던 당시에 큰 힘이 되었다. 


그때 게스트하우스에는 존이라는 미국 아저씨도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다가 경제가 어려워서 해고된 후 퇴직금으로 세계여행 다니고 있는 암벽등반 매니아였다. 신장 알타이의 커커투어하이라는 곳에서 암벽을 타려고 파키스탄에서 우루무치로 건너와서 연휴 혹한기를 넘기고 있는 거였다. 춘절 기간이라 할 게 없어서 나랑 모니카랑 존이랑 셋이 숙소에서 심심풀이 땅콩하고 밥도 먹으러 나가고 그랬다.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분데스탁 (독일 연방의회) - 저 중간의 돔지붕 옆 기둥에 소련 국기가 내걸렸었다. (베를린 전투)




모니카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지만 주로 현지조사를 하느라 아제르바이잔 같은 곳에 나가있다. 당시에는 운 좋게도 베를린에서 학회가 있어서 잠깐 시간을 내어 만날 수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루 정도 같이 지냈다. 모니카는 베를린에 거의 와본 적이 없어서 내가 베를린 지리를 더 잘 알았기 때문에 (ㅋㅋㅋㅋ) 브란덴부르크 게이트와 분데스탁, 홀로코스트 메모리얼로 안내했다. 베를린에 있는 동안 거의 매일 홀린 듯이 브란덴부르크 게이트와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을 갔었다. 저 어두운 것들이 우뚝우뚝 서있는 곳이 바로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인데 신기하게도 지금은 베를린 게이들의 셀카 명소가 되어 있다. 나도 찍었는데 ㅋㅋㅋ 그라인더 같은 게이 앱에서 베를린을 지역설정 해놓으면 프로필 사진에 이곳이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베를린에서 간 곳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이 의외로 유대인 박물관이다. 천장 높이가 헤아려지지도 않는 어두운 방, 치솟아 있는 삭막한 구조물들, 멀리서 희미하게 비쳐 들어오는 불빛, 발 밑에 깔린 아이들 얼굴... 이곳에 다녀온 후로 '피와 뼈 위에 세워진 오늘 이곳'이라는 비유를 자주 사용한다. 메모들은 내가 남긴 것이다. 마지막 것은 내가 쓰진 않았는데 제일 눈에 띄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폭격으로 일부가 파괴된 카이저 빌헬름 교회. 내부에 모자이크 벽화(?)가 굉장히 위엄있고 고퀄리티라 이곳에서 엽서를 많이 사왔다. 제일 기억에 남는 곳 중 하나다. 근처의 베를린 동물원 역은 내부 장식이 깔끔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페르가몬 박물관. 이때 박물관을 하도 많이 가서 사실 뭐가 뭔지 많이 헷갈리는데 이곳은 그냥 통째로 중근동/소아시아 지역 유적을 뜯어왔다. 대부분 박물관이 그랬다. 베를린 방문 목적이었던 달렘 미술관의 알베르트 폰 르콕 컬렉션도 마찬가지로 신장의 베제클리크 석굴이나 키질 천불동을 톱질해 온 거였다. 그거는 나중에 따로 씀.




어느 박물관인지는 이제 헷갈리는데 Georg Kolbe의 Die Goldene Insel (The Golden Isle). 사람들이 눈부셔서 고개를 못 듦. 이날인가 그 다음날인가 박물관 몰아서 보다가 잠깐 루스트가르텐에 앉아 쉬는데 어떤 분이 말을 걸었다. 얘기하다 보니 한국 분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민간 캐나다 교포로 몬트리얼에서 유기화학을 전공하는 과학자였다. 장학금 같은 걸 받아 휴가차 독일-오스트리아 여행 중이셨다. 동선이 겹쳐서 박물관 두어 개 같이 구경했다. 기독교 상징이나 인물 같은 걸 거의 모르는데 이 분 가족들이 기독교를 믿으셔서 어릴 때 들은 얘기들을 해주신 덕분에 조금 낫게 구경할 수 있었다. 이민 나가고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한국 뉴스를 하나하나 다 챙겨보고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셔서 깜짝 놀랐었다. 구경하고 나오니까 초저녁이라 길에 앉아서 맥주 한병 가볍게 하고, 아마 나는 친구 만나서 포츠담에 있는 친구 집으로 이동했던 듯 하다. 이 화학자 분은 작년 연말에 친구들이랑 같이 한국에 놀러오셨는데 그때 다같이 뵙고 엄청 마셨다. 다트게임 대역전해서 이기고 와 진짜 그다음날 극강의 행오버 속에 하루종일을 좀비처럼 보냈던 기억이 난다 ㅋㅋㅋㅋㅋ 포닥 끝나고 잡서치 중이라고 하셨는데 잘 되셔서 꼭 좋은 곳에 자리잡으셨으면 좋겠다! 







포츠담에 있는 친구 집. 교환학생 끝나고 복학해서 중국어 안 까먹으려고 교환학생 버디 동호회에 가입했었는데 그때 같은 조였던 독일 친구 힐코네 집이다당시 내 버디는 중국이랑 타이완에서 온 여학생들이었는데 힐코가 타이완에 산 적이 있어서 같이 얘길 하다가 친해졌다. 힐코는 수학과 석사생인데 언어를 좋아해서 영어는 거의 완벽이고, 중국어도 굉장히 잘하고, 태권도를 선수급으로 해서 대회 다닐 일이 많기 때문에 한국어도 따로 배웠다. 내가 갔을 당시에는 스페인어도 배우는 중이었음. 힐코는 우리 학교에서 단 한 학기 공부하고 귀국했지만 태권도 대회나 학생 인솔하는 일로 거의 매년 한국에 오기 때문에 1년에 1-2번 볼 수 있다. 이 녀석도 같이 이야기할 것이 무궁무진한 재미난 친구다. 역시나 힐코네 가족들 아니랄까봐, 이 가족은 취미가 손님 초대와 방명록 수집이다. 덕분에 편안한 다락방에서 며칠 머무를 수 있었다. 그때 힐코랑 힐코 어머니께서 삶의 세 가지 기둥(일, 인간관계, 취미)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고, 뭔가 머릿속에 전구가 켜지는 느낌을 받고는 그 이후에 항상 그 균형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려고 노력해 왔다. 일상에 많은 영향을 준 분들이다. ㅎㅎㅎ 어머님과 할머님과 친구에게 방명록이랑 카드를 남기고 왔다. 


포츠담에서는 상수시 궁전을 봤는데 사진 굳이 찍지 않았다. 포츠담 회담 열린 곳은 우리가 게을러서 안 갔다 ㅋㅋㅋ 유일하게 남아있는 포츠담 관광지 사진이 저 감자왕 프리드리히 대왕 기념물. 


...


올해 휴가철 곧 다가오는데 2년 전 독일 얘기도 아직 없길래 뜬금없이 지금 꺼내봤다. 물론 작년 런던 파리 얘기도 거의 안 썼는데 거기야 뭐 워낙 많이들 가서 잘 알고 있으니까 내가 새롭게 보탤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게다가 워낙 런던 파리 그 자체보다는 중국에서 가져온 약탈문화재 보러 간 거라 사실 막 런던과 파리만의 매력을 엄청 즐긴 편은 아니다. 대박물관이랑 도서관 가려고 준비한 과정과 결과 같은 건 글로 꽤 많이 남겼었다. 베를린은 그와는 다르게 도시 자체도 많이 기대하고 갔고 친구들도 만났으면서 여행잡담이든 실크로드 이야기든 거의 남긴 게 없길래 이번 휴가철 전에 해놓기로 마음을 먹었다. 


게을러서 여행기 같은 것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진을 찍고 메모하고 일기를 쓰기보다 그냥 그 순간 즐기는 것에 초점을 두는 편이고, 남을 것은 남고 잊힐 것은 잊히겠지 하고 편히 생각한다. 그래도 달렘 미술관 얘기는 별도의 글로 남겨야겠다. 이것 때문에 간 베를린인데 2년이 되도록 안 한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 아마 당시 귀국 직후 독일병이 걸려서 여행을 뒤돌아볼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ㅎㅎㅎㅎ 그 큰 강대국의 수도면서 인구수도 산뜻하고 지하철은 텅텅 비어있고 월세도 위협적이지 않았던 베를린. 어딘가 투박하긴 하지만 조용하고 산뜻해서 그대로 눌러앉고 싶었던 곳. 아 그때 그 유명한 베를린 클럽을 안 가봐서 조용하게 기억하나?? 맥주 본고장까지 가서 맥주를 딱 한병만 마시는 실례를 저지르는 바람에 와일드한 베를린을 아직 영접하지 못하였기 때문인가? 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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