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홍콩 사법 이야기 (3) - 이중언어 법정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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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도 반환 이후 홍콩은 양문삼어(兩文三語) 정책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두 가지 문어와(영어, 중국어) 세 가지 구어(영어, 광둥어, 만다린)를 공식 인정합니다. 일상 생활에서 가족·친구들과는 광둥어를 쓰며 이 경우 다른 언어로는 어색합니다. 만다린은 학교 수업에서 외국어처럼 배웁니다. 중등교육은 크게 광둥어 학교와 영어 학교로 나뉘어 있고 일반적으로 영어 학교가 시험 쳐서 들어가야 하는 명문 학교입니다. 회사에서는 외국계거나 외국인 직원이 많은 경우에 영어를 쓰는 곳이 많이 있지요. 그렇다면 법정에서는 어떤 언어가 사용되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이 글에서는 홍콩 법조계의 이중언어에 대한 간단한 역사와 현황, 그리고 홍콩 정치의 핫토픽 중 핫토픽인 법치주의와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홍콩 이중언어의 역사
식민지 시절 홍콩 공공 부문에서는 영어만 쓰였습니다. 공식어가 영어밖에 없어서 모든 정무가 영어로 이루어졌고 일상생활은 광둥어가 지배했습니다. 1960년대까지는 엘리트만이 영어와 광둥어를 둘다 구사했고 1970년대 들어서야 의무교육에 영어교육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영어는 여전히 일상과는 유리된 행정, 비즈니스, 교육의 수단이었죠. 전형적인 엘리트·위세 언어였고요. 1968년에 노동자들이 식민 당국에 반발하여 홍콩 역사상 처음으로 폭동을 일으키면서 정부는 유화책의 필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1974년도에 Official Languages Ordinance가 제정되면서 비로소 광둥어가 공용어로 지정됩니다. 이후 공적 부문에서도 광둥어가 쓰이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영어가 우세했지요. 1997년 이후에도 두 언어가 모두 공식적으로 인정되지만 두 언어가 완벽하게 서로 번역이 되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언어를 택하든 온전하게 대체 가능한 관계가 아닙니다. 재판정을 들여다보면 두 언어 간 분업 체계가 뚜렷이 보입니다.
2. 홍콩 법정의 이중언어 실태
이전 글에서도 다뤘듯이 홍콩의 법은 영연방 보통법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중국 내륙은 사회주의 대륙법을 채택하고 있지만 일국양제에 의해 반환 이전의 법체계를 거의 그대로 보장받았습니다. 보통법은 영어로 된 법률 개념과 영연방 국가의 판례를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홍콩 법조계의 기본 언어는 여전히 영어입니다. 지금까지도 많은 재판이 영어로 이루어집니다. 덕분에 호주, 뉴질랜드, 영국 같은 곳의 명망 있는 판사들이 홍콩으로 초빙되어 홍콩 판사로 재직할 수 있죠. (2017/04/10 - [중점추진사업/홍콩] - 홍콩 사법 이야기 (1) - 홍콩의 외국인 판사) 홍콩의 법학과 학생들도 모두 영어로 교육을 받고, 사무변호사(solicitor)들도 주로 영어로 사무를 보고 문건을 처리하며, 송무변호사(barrister)들도 영어로 변론과 대질신문을 합니다. 소송당사자가 영어를 하지 못할 경우에는 통역사가 배당되어 순차통역을 통해 재판을 진행합니다.
여느 나라와 다를 것 없이 홍콩 법조계에도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여러 가지 관습이 존재합니다. 진지한 법복을 빼입은 채 법조인 사이에서 통하는 의례적인 매너와 특수한 언어 표현을 사용하죠. 서로를 learned friend라고 칭한다거나 판사를 My lord / My lady라고 부르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심지어 사극에서나 본 17세기 스타일의 빠글빠글 흰머리 가발도 여전히 사용합니다. 가발에서 냄새가 많이 날수록 경륜의 상징이라는군요. 이처럼 연극적인 의식을 통해 법정의 권위를 드러내는데 이때도 영어 사용이 전제가 됩니다. 이 모든 게 영국에서 왔기 때문이지요. 이걸 광둥어로 할 경우에는 아우라가 몽땅 사라지고 우스꽝스러워집니다. 어떤 법조인은 learned friend를 博學的朋友로 번역해서 말하는 걸 듣고는 너무 민망해서 소름이 쭉 끼쳤다고 합니다.
http://www.telegraph.co.uk/news/worldnews/asia/hongkong/9802083/Hong-Kong-wig-row-for-lawyers.html
광둥어는 성룡이나 주성치 영화 하나쯤 전부 보셨을 테니 어떤 느낌인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방언인데다가 가족과 친구 사이에서 쓰는 속된 일상어입니다. 입으로는 매일 말하는데 마땅한 한자가 없어서 표기가 불가능한 단어가 많을 만큼 구어 본위의 언어입니다. 엄숙한 형식주의로 가득찬 법정에 이 와글와글한 광둥어가 끼어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판사와 변호사, 소송 당사자, 증인들이 모두 광둥어를 사용하는 재판의 경우, 소송 당사자들이 통역을 거치지 않고 직접 자기 얘기를 하게 됩니다. 인생 드라마를 구구절절 풀면서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죠. 구어체로 직접 하는 자기 얘기기 때문에 범속하지만 생동감이 있습니다. 가끔 재담이 펼쳐지기도 하고요. 법률과 논리보다는 도덕과 상식의 차원에 호소하는 일이 많습니다. 판관 포청천 앞에 가서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될 것 같습니다. 판사의 판결문에도 현명한 부모님이 자녀를 타이르듯 하는 내용이 조금씩 가미됩니다. 사소한 범죄나 분쟁, 가사 사건 등을 담당하는 하급 법정에서는 이런 광둥어 재판이 이미 절대 다수를 차지합니다.
영어 재판에서는 광둥어 진술이 모두 영어로 순차통역 됩니다. 1:1 기계적 통역이 기본적 원칙이지만 아무래도 법조계 레지스터에 맞춰 통역하게 됩니다. 이렇게 통역된 발언은 건조하고 형식적인 진술로 바뀝니다. 비유나 상징, 특정 문화권의 사람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요소를 배제한 테크니컬하고 간결명료한 표현이 주조를 이룹니다. 엄숙하고 진지하죠. 문장 단위로 순차통역을 하기 때문에 재판의 진행 속도는 느립니다. 증인들과 대질신문을 하거나 증거를 수집할 때는 광둥어를 직접 쓰는 게 확실히 신속합니다. 대신 법의 원천은 영어이기 때문에 법리를 논하기에는 영어가 훨씬 편리합니다. 그래서 팩트체크에는 광둥어를, 법리 검토와 변론에는 영어를 사용하는 이중언어 재판도 있습니다. 개별 사안보다 법률 자체를 검토하는 상급 법정일수록 영어 재판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종심법원에서는 지금껏 영어 재판만 있었습니다.
이처럼 원칙적으로는 광둥어와 영어의 지위가 동일하지만 실제 법정에서는 뚜렷이 기능 분화가 되어 있습니다. 영어의 토대 위에 수백 년간 쌓아올린 법률과 판례를 중국어로 번역하는 데 상당히 무리가 있기 때문에 아직도 번역이 다 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많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번역본이 있다고 해도 중국어 법률 용어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해의 소지가 많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어 법전을 이해하기 위해서 영어 원문과 필히 대조하는 상황입니다. 즉 보통법을 번역해 놓은 중국어 법전은 온전히 홀로서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광둥어는 공식적 컨텍스트에서 사용된 역사가 극히 짧기 때문에 기본적인 법률 용어뿐만 아니라 매너리즘, 말투 등을 구현하기 위한 레지스터도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판결문을 중국어로 작성하려면 영어에 비해 4배의 시간이 든다고 합니다. 광둥어 재판인 경우에는 그나마 번역의 과정이 빠지니 좀더 기록이 용이하다 할지라도, 하급 법정에서 취급하는 사소한 사건이 대부분이라 법조계 전체에 미치는 임팩트가 적습니다.
3. 법치주의와의 관계
식민통치 시기의 법률은 100% 영어였기 때문에 일반 대중과 상당히 괴리되어 있었습니다. 이 시기의 법치주의는 하향식 통치와 식민 지배를 위한 절차적 정의에 해당했을 뿐, 그 실질을 들여다보면 총독을 견제하는 기구도 권력 분립도 인권이나 시민권 논의도 없었습니다. 홍콩 반환이 결정된 후에 영국은 간지를 부리며 퇴장해야 했기 때문에 투표권을 조금 확대시키고 1991년에 Hong Kong Bill of Rights Ordinance를 제정하는 등 민주적 행보를 보였습니다. 마침 천안문 사태가 일어나면서 중국에 대한 반발과 공포가 가득한 가운데 엄청난 대조 효과가 발생하기도 했고요. 바로 이때부터 보편 인권과 시민권을 위한 장치로서의 법치주의가 강조되기 시작합니다. 이후 2003년에는 홍콩 기본법 23조에 바탕을 둔 국가보안법(Anti-subversion Law, National Security Law) 제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2017/04/04 - [중점추진사업/홍콩] - 2017년도 홍콩 행정장관 선거 이야기 (3)) 이 일을 계기로 법치주의는 홍콩의 정치적 아젠다로 확실히 자리잡게 되지요.
많은 홍콩 사람들이 보통법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위세 언어인 영어로 전문직을 수행하며 기득권을 꽉 잡고 있는 법조인은 물론, 일반 시민들도 중국 통치에 대해 불신이 크기 때문에 독립적인 사법 체계를 수호하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이 보통법 체계는 뿌리부터 영국 식민통치와 영어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영어는 일반 대중이 편안하게 구사하는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영어 위주로 법률 체계가 편성될 경우 법률 서비스에 대한 장벽이 높아집니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말로 쓰인 법의 통치를 받을 뿐, 법을 통해 권리를 보장받는 데는 큰 불편이 따르는 것이지요. 이처럼 홍콩은 자치를 위해서 식민 유산을 옹호해야 하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불평등한 언어 상황을 옹호해야 하는 기묘한 아이러니에 빠진 신기한 곳입니다.
홍콩 법정에서 이중언어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대해 이의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기본 근간은 영어 위주로 돌아가야 한다는 입장부터 중국어 보통법도 안될 것 없다는 의견에 이르기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합니다. 전반적으로는 보통법 자체가 영어에서 태어난 것이고 영어 사용이 내륙 중국과의 확실한 차별점이기 때문에 영어를 포기할 수 없다는 의견이 우세한 편이고요. 최근 들어서는 만다린의 영향력도 점점 커짐에 따라 이것을 중국의 위협으로 보는 입장부터 홍콩이 중국의 법률 선진화를 이끌 기회라는 주장까지 또 시각이 다양합니다.
자 그럼 여기까지,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어려운 홍콩의 이중언어 법조계와 이를 둘러싼 흥미진진한 아이러니를 살펴보았습니다. 이 글은 Kwai Hang Ng의 The Common Law in Two Voices: Language, Law, and the Postcolonial Dilemma in Hong Kong를 읽고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2017/05/16 - [중점추진사업/홍콩] - The Common Law in Two Voices 리뷰)
** 이 글의 무단 사용을 금합니다. 배포, 인용, 내용 변경 전에 글 하단의 CCL 아이콘과 안내문(http://bravebird.tistory.com/359)을 반드시 확인하십시오. 불펌 발각 시 엄중대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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