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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화권

타이페이 용산사에서

bravebird 2019.01.06 13:19



용산사는 타이페이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도교의 신전은 흥미롭다.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 월하노인 같은 가상의 존재, 그리고 화타나 관우 같은 실존 인물 등 온갖 것을 섬긴다. 주로 건강, 시험운, 재운, 뱃사람들의 고장이니까 해상 안전, 배우자 복이나 자식복 같은 걸 빈다. 기복적이고 아주 인간적인 내용이다. 용산사에 가면 이런 별의별 기도를 올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다. 나는 얼마 전에 타이페이 여행을 가서 주변 사람들 기도는 잔뜩 했지만 정작 내 기도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선량한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뭘 기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나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부럽다. 그런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자발적이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잔다. 갖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다. 자기 감정과 본능을 똑바로 바라보고, 내면의 어린아이가 살아 있다. 장난꾸러기들도 정말 좋다. 다른 사람을 놀리기도 하고 놀림을 받기도 하는데 크게 선을 넘지는 않고 무해하다. 이를 드러내고 크게 웃는다. 이런 사람들은 나이가 들수록 흔치 않은 것 같다. 이런 천진난만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그룹에 들어가서 그렇게 어울리려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타이페이 여행 때 왠지 카라마조프 형제들 책을 가져가서 읽고 싶었다. 첫 번째 아들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위에서 얘기한 사람이랑 많이 비슷하다. 드미트리는 감정이 풍부하고 본능이 강해서 그 드라이브대로 움직이다 보니 실수도 많이 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타이페이에서 유학 중인 대학 선배와 로컬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서로 놀리기도 하고 많이 웃는 것이 영락없는 장난꾸러기들이었다. 다들 똑똑했지만 여유로웠다. 나는 그게 정말 마음에 든다고 말했는데, 보통 난 실수를 하지 않으려다 보니 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금방 유머로 긴장을 풀어주었고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다. 타이페이에 새로운 동지들이 생겨서 좋다. 홍콩에 대해 똑같은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는 친구도 새로 사귀었다. 


아버지가 최근에 은퇴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보통 은퇴식 때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서 민요 몇 곡을 뽑으셨다. 무엇보다도 그게 놀랍고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몇 방울 났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조직 중 하나에서 30년 이상을 일하셨다. 본인의 일을 진심으로 사랑하셨고 사명감과 자부심으로 열심히 일하셨으니 정말 엄숙하고 재미없는 사람일 법도 한데, 아버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고 여전히 어린아이 내지 꿈돌이 같은 면을 그대로 갖고 계신다. 항상 경이롭다. 나는 아버지를 정말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한다. 그 연배 또래 중에 아버지 같은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원래 아버지랑 같이 타이페이 여행을 갈 계획이었으나 아버지가 갑자기 허리가 안 좋아지셔서 혼자 가서 노닐다 왔다. 만약 아버지랑 같이 용산사를 갔다면 아무런 주저 없이 소원 몇 가지를 바로 떠올리고 비셨을 것이다. 나는 용산사를 원래 좋아해서 아예 이번에는 근처에 숙소를 잡았고 별다른 여행 계획도 없이 쉬러 간 거기 때문에 거의 매일 찾았지만 내 자신을 위한 소원은 그다지 떠올릴 수 없었다. 뭘 원하는지 깨닫고 표현할 수 있게 될 때까지는 항상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다음에 용산사를 다시 찾게 되면 그냥 평범한 몇 가지 소원(돈 많이 벌게 해달라든가 멋진 상체 근육을 갖고 싶다든가)을 바로 떠올려서 빌 수 있으면 좋겠고, 먹고 싶은 음식도 많았으면 좋겠다. 나와 내 주변이 더 어린아이 같고 좀더 야단법석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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