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베이징 후통, 평범한 오후 본문
베이징에서, 아니 어쩌면 아마 내가 아는 장소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곳을 실컷 쏘다닌 얘기를 해보겠다.
베이징 종루(钟楼)와 고루(鼓楼) 근처에는 원나라 시대부터 오래된 명소인 후통(胡同, 골목길)이 많다. 이곳에는 나이 지긋한 라오베이징(老北京) 어르신들이 많이 살고 있다. 물론 엄격하게는 최소 3대가 여기서 산 노인이라야 라오베이징 사람으로 치지만 나한테는 뭐 다 엄청난 베이징 선배님들만 가득한 곳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공간이자, 낮에 햇볕 쬐고 이웃들끼리 잡담 하고 장기 한판 두는 휴한의 공간이다. 내 꿈은 언젠가 여기 할아부지들 마작판에 쓱 끼어들어서 마작을 배우는 것이기 때문에 이번에 얼굴도장 찍으려고 거의 매일매일 출석체크를 했다. 아마 이 꿈은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종고루 근처의 이 후통 밀집 지구는 베이징에 처음 갔을 때부터 제일 좋아해서 그냥 할일 없이 가서 쏘다닌 적도 많다. 베이징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고 도착하면 가장 먼저 가는 곳이다. 이번에는 숙소도 가까운 난뤄구샹이라 더더욱 열심히 출석체크를 했다. 며칠 지켜보니까 매일 햇볓 쬐는 할머니들 모임이 있는데 쓱 자리잡고 얘기 들어보면 이런 얘기들 하고 계신다.
"나는 올해 95살인데 당신은 몇 살이우?"
"72살이에유."
"아직 젊네. 우리 어머니는 바로 옆에 양로원에서 101살까지 사셨수. 나는 소싯적에 농구 선수라 지금도 건강해. 근데 귀는 잘 안 들려. 이는 다 갈았고."
시간은 공평하다. 노인들에겐 눈은 보이고 귀는 들리는지, 자녀는 몇인지, 다들 건강한지, 자주 찾아오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결국은 누구나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앞에 지금 내가 퇴근을 몇시에 하네 마네, 연봉이 느네 주네 동동거리는 거 다 잠깐이고 부질없게 보인다. 한세월 넘긴 노인들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내 당장의 골칫거리가 하찮아져서 좋다. 게다가 이 어르신들은 신해혁명 일어나고 청조 망하는 이야기를 내가 5공화국 얘기를 부모님한테 듣듯이 가깝게 접한 분들이다. 마오쩌둥이랑 장지에스 얘기는 신문에서 지겹도록 읽었을 것이고, 대약진 운동이랑 문화대혁명 때 쫄쫄 굶고 완장 차고 돌아다니신 분도 있을 거고, 천안문 사태 때 탱크 소리는 집안에 앉아서 육성으로 들으셨을 거다. 그래도 다 살아 계신다. 다 지나가는 모양이다. 심지어 그런 극한의 기억도 희미해져 가기 때문에 머리 쓰는 게임을 열심히 하신다. 마작, 장기, 오목, 삼국지, 숫자게임..
위 사진은 옛날부터 베이징 서민들의 휴식 공간인 유명한 호수 스차하이(什刹海) 근처의 아침 태극권 모임이다. 아래 사진은 종루 바로 뒤의 태극권 모임이다. 아침에는 이렇게 태극권 하는 어르신, 낮에는 아기 산책 시키는 어른들, 밤에는 광장무나 사교춤을 추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많이 나와 계신다. 물론 베이징 도심의 최고 관광지인 스차하이, 베이하이, 징산 공원, 자금성, 난뤄구샹 모두가 지척이기 때문에 후통 투어 중인 관광객들과 인력거 기사들도 많지만 집밖에 마실 나온 주민들이 많고 그래서 사람 구경 하기에 최적의 장소이다. 나이가 지긋하고 시간 여유가 많은 분들이기 때문에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걸어도 아무 위화감이 없이 잘 받아주신다.
중년 아주머니들(大妈)이 대다수인 광장무 정도는 철판 깔고 끼어들어서 같이 할 수 있다. 어차피 밤에 멀리서 보면 다 비슷한 거. 심지어 재밌어서 저녁에 틈만 나면 나가서 하는 편이다. 종고루 입구를 지키고 선 공안 아저씨들한테 물어보니 역시나 매일 밤 8시에서 9시까지 광장무 모임이 있었다. 아저씨들이 어린 아가씨가 그런 거 물어본다고 재밌어 하셔서 같이 웃었다. ㅋㅋㅋㅋ 저녁 약속 없는 날은 무조건 간다는 원칙을 세우고 2번 갔다. 못해도 재밌게 추면 된다. 아무도 뭐라고 안 한다. 아줌마들 다들 그렇게 시작해서 지금은 수십 곡을 마스터하고 영혼을 담아 춤춘다. 근데 노년층 위주인 태극권은 아직 해볼 생각을 못했다. 다음 번에는 철판 레벨을 높여서 태극권에 도전해 봐야겠다.
이렇게 밖에 어정어정 나가서 춤추고 움직이고 이야기 나누는 생활 문화를 높이 평가한다. 특히 건강 뿐 아니라 심리적 위기를 겪을 수 있는 중노년층에게 더없이 훌륭한 취미 생활이다. 굳이 돈 내고 스포츠 센터나 카페까지 갈 필요 없이, 개방된 공공 공간을 주민들이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것도 훌륭하다. 물론 광장무의 음악 소리가 소음공해의 원인이 되어서 송사로도 이어진다고 하는데, 그런 점만 적당히 조절하면 더할 나위 없는 문화라고 생각한다. 특히 광장무를 통해서 현대 중국의 여가 문화, 도시와 인구 문제, 집단 행동과 개인 행동, 정부의 민간 통제, 공간에 대한 개념 등등 상당히 많은 현상을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에 광장무 관련 사회학 책도 한 권 사왔다. 기회가 되면 읽고 소개해 보고 싶은 열의는 엄청나지만 과연 언제? 지금 별다른 참고자료 같은 것도 없이 마음대로 편하게 쓰는 이 글 하나도 작성하는 데 너무나 오래 걸린다.
도심에 호수가 많다. 시하이(西海), 스차하이(什刹海), 베이하이(北海), 중난하이(中南海) 정도로 나누어지는데 위의 사진은 주로 시하이다. 이쪽이 도심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어 한적하고 상업화가 덜 되었다. 그래도 스차하이, 베이하이, 중난하이까지 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기 때문에 굳이 번잡하고 임대료 높은 스차하이에서 큰돈 쓸 필요 없이, 조금만 더 걸어서 시하이로 오면 훨씬 여유를 즐길 수 있다. 시하이 근처에는 원대의 치수(治水) 대가로 유명한 곽수경(郭守敬) 선생 기념관이 있는데 지금은 보수 중인지 문을 닫았다. 시하이 옆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랑 요구르트를 사 마시면서 주인 할머니랑 이야기를 잠깐 나눴는데, 가게 천장에 여치집을 두 개 매달아 놓으셨다. 호수변의 한가로운 정경과 여치 소리가 기억에 남는다.
시하이와 스차하이는 서민 주거 지역 근처에 있어서 예로부터 서민들의 휴식 공간이었지만 베이하이와 중난하이는 황성에 속했다. 베이하이에는 황실의 공원이 마련돼 있고, 중난하이 근처는 옛날부터 지금까지 고관대작 차지다. 지금도 중국 공산당 수뇌부들이 살고 있는 정치 1번지로 일반인의 접근이 불가하다. 공안이 접근을 막고 있다. 자금성 바로 서편의 난창제(南长街)를 걸어 올라가면 지도상으로는 분명히 중난하이가 보여야 되는데 대저택 담장이 하도 높아서 호수 같은 것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요 바로 위에 사진은 이번에 찍은 사진 중에 왠지 제일 마음에 든다. 후통의 한적한 오후. 저렇게 햇빛 받으며 장기 한판 두는 아저씨들, 가게 앞에 앉아서 사람 구경하는 할머니들한테 눈이 간다. 아마 내 장래희망이라 그렇지 않을까? ㅋㅋㅋ 여하튼 이런 순간 순간들이 중국을, 베이징을, 종고루 광장과 후통을 좋아해서 자꾸 찾아가는 이유다. 특별히 깨끗하지도 대단히 아름답지도 않고, 하품나는 공산당 프로파간다가 덕지덕지 붙은데다, 상의 탈의한 배 나온 아저씨들이 가득한데 뭐 좋냐고 물으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더없이 재미가 있어유.
아무 특별할 것은 없는 사진이지만 여긴 제일 익숙하고 정든 후통이다. 구로우 따지에(鼓楼大街)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남쪽의 자금성 방향으로 조금 걷다가 왼쪽으로 꺾어 종고루를 갈 때 지나가는 豆腐池 후통. 항상 이 길로 갔는데도 이때까지 몰랐는데, 이번에 지도를 보니 마오쩌둥 고택 중 하나가 바로 이 후통에 있었다. 가봤더니 杨昌济 고택이라고 팻말이 붙어 있었다. 양창제가 누군지 물어보니까 마오쩌둥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라고 한다.
후통의 평범한 오후를 소묘 중인 학생.
이 종고루 근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가서는 떡 앉아서 주민 분들이랑 얘기를 몇 시간이고 했다. 여러 번 마주쳐서 낯이 익은 어르신들이 꽤 된다. 너 녹음하고 있는 거 아니지, 하고 계속 물으시면서 1989년 6.4 때 탱크소리 들었다고 얘기해주신 분이 있다. 어떤 아저씨들은 너네 박근혜 어찌 된 거냐고 물어보시길래 손으로 모가지 치는 흉내를 내니까 엄청 웃고 다음날까지도 흉내를 내셨다. ㅋㅋㅋ 저 위에 95세 할머님은 얘기를 나눈 다음 날 또 계시길래 인사 드렸는데 기억을 하지 못하셨다. 명13릉 가는 아침에도 여길 찍고 지하철역에 가는 길이었는데, 그 전날 뵌 초로의 할아버지가 계시길래 잠깐 앉아서 얘기 나누다가 혹시나 해서 더 쉬운 교통편을 여쭤보았다. 지하철 타지 말고 근처 덕승문에서 명13릉까지 한방에 가는 버스 타라 하셨다. 덕승문까지 버스 어떻게 타는지 몰라서 쭈뼛쭈뼛하니까 자전거 꺼내와서 5분만에 태워다 주셨다...!!!!! 우왕!!!!!!!!! 완전 내 장래희망을 성취한 분이잖아! 재미난 얘기 들려주는 유유자적한 노인!!!
"师傅,我太感谢你了。您贵姓?" (아저씨, 정말 감사드려요. 성씨가 어떻게 되세요?) -- 모르는 사람 편히 높이려면 상대방 성에다가 사부님 할 때 그 '사부'를 붙여 부르면 된다
“我姓杨。” (양씨야.)
“杨师傅,我再来北京的时候一定会找您!我每次都来这儿。” (양 사부님, 베이징 다시 오면 꼭 인사 드릴게요. 종고루 광장은 매번 오니까요!)
“你什么时候来?” (또 언제 오는데?)
“明年吧。" (내년으로 하죠!!)
이렇게 길만 나서면 크고 작은 도움을 많이 받고 자잘한 추억이 쌓인다. 특히 중국에서 가는 곳마다 대접을 잘 받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기 때문에 나도 한국에서 마주치는 중국 사람들에게 작은 친절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근데 제 이야기 읽고 아무나 믿고 자전거 타고 따라가고 그러면 절대 안돼요. 조상님이 보우하시는지 전생에 중국이랑 인연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봐도 운이 많이 좋은 축에 든다. 나는 나름대로 상대방이 나쁜 짓 꾸밀 틈이 없었다는 것 + 퇴로가 있다는 것을 판단한 다음에 사람을 믿기로 결정하지만, 실은 다행히도 좋은 사람들만 마주쳤기 때문에 별고 없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중국 여행 중에 낯선 사람을 잘 믿는다고 조금 걱정을 한다.
이 라오베이징 후통 밀집 지역은 2011-12년 당시에는 구로우 따지에 역만 있었는데 지금은 스차하이(什刹海), 베이하이베이(北海北), 난뤄구샹(南锣鼓巷) 지하철역이 다 생겨서 접근성이 한층 더 높아졌다. 이 지역은 자금성 바로 뒤편에 있는 도심 중의 도심이면서도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인데, 안타깝게도 난개발로 이미 후통이 많이 헐렸다. 흔적이 사라지기 전에 부지런히 가야 하는 곳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대손손 오랫동안 사신 집인데 노년에 헐값에 헐리는 일 없었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기분 좋은 날씨에 햇빛 많이 쬐고 친구도 많이 사귀시고 태극권 부지런히 하셔서 건강하고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 다음에 갔는데 기억 못하셔서 또 나이 세고 임플란트 개수 꼽고 자식 자랑 하셔도 괜찮으니까 그 자리에 그대로 정정히 계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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