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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남아시아

인도 여행의 매력

bravebird 2020. 2. 11. 20:05

인도는 당신의 계획을 보란듯이 망쳐놓는 예측불가능성의 끝판왕인 동시에, 가지가지 삼천포를 함께 제공하는 치명적 매력을 가진 나라입니다. 인도에서 가장 재미있는 점은 계획은커녕 상상조차 못한 일들이 벌어질 때 본인의 문제 해결력을 시험해볼 수 있고, 사전 계획이 불가능한 삼천포에 제대로 빠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에 뉴델리에서 다람살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가 한번 취소됐습니다. 여행 시간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고 이른 아침 항공편을 예매하는 꾀를 부렸다가 오히려 망한 거죠. 인도는 절대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녀석인데 제가 컨트롤하려 했던 것이 건방졌나 봅니다. ㅎㅎㅎ 새벽 3시에 그 무서운 빠하르간즈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에 도착한 후에야 결항이 된 걸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 겨울 북인도에선 운무로 인한 결항이나 열차 지연이 아주 흔하다네요. 자기 전에 구글로 확인했을 땐 분명 멀쩡했는데 출발 직전에 다시 확인 안한 제 잘못이죠 뭐... 인도에선 출발 직전까지 flight status, train status 확인하셔야 합니다! 꼭!

 

길을 나서기 직전에 구글에서 반드시 확인할 것 -_-


공항까지 와버린 김에 일이나 처리해놓기로 했습니다. 여행자 보험 약관 확인, 항공사 카운터에서 결항 사유 확인, 결항 증빙 수령, 전액 환불 요청, 다람살라에 3박 예약해 놓은 숙소 취소 같은 것들요. 근데 숙소 주인 왈, 기한이 지나서 무료 취소가 안 되니까 나는 모르겠고 부킹닷컴이랑 이야기해 보라더군요!? WTF?! 그 자리에서 부킹닷컴에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나니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 당장 답이 올 것도 아니고 대체 항공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시내로 돌아가야죠 뭐. 우버 말고 새로운 교통수단을 시도해 보려고 공항철도를 도전했는데 의외로 빠하르간즈까지 20분 정도밖에 안 걸리고 아주 저렴했습니다. 원래 뉴델리 공항에서 빠하르간즈까지 이동하는 게 인도 여행의 첫 퀘스트라 할 만큼 악명이 높아서 해본 거였는데 허무할 만큼 간단하던데요...? 무조건 공항철도 타세요! 

어쨌든 이날은 그냥 아무 계획도 없이 한량처럼 놀았습니다. 원래 지내던 숙소 근처의 짜이 가게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 가게는 한국인 여행자를 주로 상대하는 인도인이 운영하는데 숙소 근처라 마실 나가기 좋은 곳이었어요. 교통편 예매를 도와주는 곳이기도 하고요. 당장 갈 곳이 없어진 제겐 너무나도 요긴한 피난처였죠. 

 

감사한 피난처


이날 저는 여행에서 해본 적이 없는 '낮잠'이란 것도 자 보았고요. 전역하고 돈 모아서 같이 인도 여행온 대한민국 해병들이랑 친구도 먹었습니다 ㅋㅋ 그 다음날까지도 뉴델리에 머물면서 그 전까지 알지도 못했던 푸라나 킬라, 아그라센 키 바올리 같은 명소들도 가봤습니다. 이날 옥스포드 서점에선 갖고 싶었던 책들을 거짓말 같은 싼 가격에 건졌고요. 인디아 게이트에선 마린 보이들이 사진 찍어줘서 인생 사진도 남겼습니다. 이번 주말에도 이 마린 보이들을 만날 예정이고 롤도 자주 같이 합니다. 이 중 하나는 제 얘길 듣고 베이징에 교환학생을 가기로 결심하더니 여행 중에 지원서를 내고 북경사범대에 합격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삶에서 잊을 수 없을 중대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어 영광이었습니다.

 

아그라센 키 바올리 (뒷모습이니까 올릴 수 있다!)

 

비행기 취소된 날 쓴 일기

 


이 친구는 또 승마 동아리에 들어갈 거라던데, 그거 제가 7년 전부터 벼르고만 있었는데 멀고 비싸서 못 하던 거였거든요?? 몽골 초원에서 말 달리기, 그리고 쓰촨성 쑹판에서 말 트레킹 하기가 제 오랜 꿈 중 하나였어요. 아니 대학생도 승마를 한다는데 직장인이 못할 이유가 없죠. 귀국하자마자 승마장을 찾아보고 바로 찾아가서 배우기 시작한 것이 지금 벌써 7주 정도 되었습니다. 몇 년 사이에 승마장이 많이 생기고 가격도 착해졌더군요. 숙원사업을 비행기 취소 덕분에 실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람살라 숙소 문제도 오히려 더 잘 풀렸습니다. 피치 못할 사정인데도 무료 취소를 안 해주려는 주인이 괘씸해서 새로 홈스테이를 찾았는데 그게 또 신의 한 수일 줄은. 그 홈스테이 숙소는 3대가 같이 사는 대가족이 운영하는데 호스트가 제 또래였습니다. 산악 구조대라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다람살라에서의 메인 플랜이었던 트리운드 트레킹을 수월히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눈이 많이 쌓여서 길을 찾기 힘들 정도라 동행이 반드시 필요했는데, 600루피라는 너무나 저렴한 비용으로 하루 종일 훌륭한 가이드가 되어주었습니다. 게다가 이 친구가 밴드에서 기타를 치는 덕분에 인도에서 가볼 거라 생각도 못했던 클럽도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트리운드, 이 경이로운 풍경을 나와 호스트 둘만 누리다니 너무 운이 좋았다. 내내 들개 네 마리가 따라왔는데 줄 음식이 없었어, 미안! 


비행기 취소의 나비효과가 이렇게 전개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이 모든 건 사전 계획이 불가능한 100% 우연 및 삼천포의 영역입니다!! 심지어 교통편도 오히려 더 잘 풀렸습니다. 결항된 날은 그냥 게으르게 푹 쉬고 그 다음날은 알차게 뉴델리 관광을 한 다음, 오후 7시에 버스를 타서 이튿날 아침 7시에 다람살라에 떨어지는 아름다운 일정으로 풀렸습니다. 항공편이 취소됐는데도 여행 시간을 1분도 잃지 않은 매직!! 게다가 그 버스는 키플링 소설에서나 보던 그 오래되고 유명한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쭉 따라 올라갔어요. 옛날 중국 밤기차 여행을 기억나게 하는 밤버스만의 재미도 있었고요. 

 

현재위치 그랜드 트렁크 로드 인증 스크린샷

 


인도 여행에서 매뉴얼이나 알고리즘에 존재하지도 않는 일이 일어날 때 순간적으로는 당황스럽거나 화가 납니다. 그런데 꽉 짜여진 정답이나 매뉴얼이 없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응도 자유라서 짜릿합니다. 전 비행기가 취소됐을 때 아 망했다, 하는 생각과 동시에, 드디어 모험 시작인가? 하는 흥분을 느꼈습니다. 갑자기 온 정신이 맑아지면서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과 어찌할 수 없는 일을 즉시 나누고, 컨트롤 가능한 일에 지체없이 착수하게 되더라고요. 아드레날린 러시가 바로 이런 거겠죠? 인도의 불확실성이 주는 약간의 스트레스, 그리고 도무지 정답이 없어 나의 수완만을 믿어야 하는 그 절대 자유(...및 책임감ㅋㅋㅋ)가 온 정신을 집중하게 합니다. 그 긴장이 해소될 때의 개운한 느낌은 덤이고요.

저는 일상에서는 가급적 반듯하게 계획대로 살려는 모범생 타입이고 그런 스스로를 내심 피곤해 합니다. 너무 예측이 가능해서 좀 지루하다 싶은 일상, 그리고 익숙한 길만 가는 나의 관성에 정면으로 도전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보란듯이 훼방을 놓을 개구쟁이 인도를 선택했어요. 인도는 역시나 계획을 마구 휘저어 놓더니, 전혀 생각지도 못한 즐거운 삼천포에 절 데려다 놓더군요. 

 

SO TRUE! 인도는 엔트로피 그 자체


비행기가 취소돼도 하늘이 무너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재밌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내가 리스크와 불확실성과 엔트로피를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단 것도 알게 되었고요. 대체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설계하려 해온 삶이었지만 최고의 경험은 대부분 계획을 벗어난 곳에서, 보란듯이 뒤통수를 때리는 것들이 선물해 준다는 것, 그래서 난 참 운이 좋고 세상은 흥미로운 모험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 이건 원래 알았지만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고요! 

 

인도에서 그랬던 것처럼 생각지도 못한 번거롭고 골때리는 일들이 끊임없이 절 시험해주길 바랍니다. 결코 만만치가 않겠죠. 하지만 저도 쉽게 길들진 않을 겁니다. 먼저 당당하게 맞서본 후, 결국은 그 모든 일에 감사해 하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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