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이 시국(?) 러시아에서 본문
러시아에 휴가를 온 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거의 10년 만이다. 처음 왔던 2014년엔 크림 사태가 있었고, 2025년 현재는 우크라이나 침공이 진행 중이다. 2014년 당시에 썼던 글들을 다시 보니, 당시 나름 이쪽저쪽의 입장을 모두 살펴보려는 노력이었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의 입장을 꽤 적극적으로 이해해 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2025년 5월 7일자의 생각을 덧붙인다.
다수의 러시아 사람들은 서방과 미국의 보편주의적 관점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특히 러시아인 대다수가 나라를 찢어서 팔아 넘겼다고 싫어하는 고르바초프와 옐친 시기에 겪은 극심한 혼란과 강대국 지위 상실에 대해 집단 기억이 형성돼 있어 민감하게 반응한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제국적 시각은 여전히 뿌리 깊게 남아 있다. 그 이면에는 유럽 세계에 대한 역사적으로 오래된 콤플렉스도 함께 작용한다. 소련 해체 직후 1990년대의 혼란을 최소한 표면적으로나마 진정시키고 크림 병합 등을 통해 러시아의 제국적 자존심을 떠받친다고 믿어지는 것이 푸틴이기 때문에 여전히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다. 난 공산주의도 전체주의도, 푸틴도 전혀 지지하지 않지만 기존 체제가 일거에 무너지는 혼란 상태를 집단적으로 경험했던 평범한 러시아인들이 당시 느꼈을 심정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반응에 대해선 인지적 공감 가능하다.
또한 러시아는 거의 간격 없이 연속된 전제군주제와 전체주의 및 푸틴 집권의 역사가 길어, 국민이 직접 선출한 정치 권력을 가져본 경험이 매우 제한적이기에, 민주주의 제도나 정치문화가 아직 정착되지 않았다는 점도 덧붙인다. 이는 푸틴의 현 행보를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 정치의 현실적 조건이자 구조적 한계로서 우크라이나 침공과 푸틴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가 공존하는 배경이기 때문에 언급했다. 단, 징집에 반대해 러시아를 떠난 사람도 내 지인 중에 적지 않다는 점 역시 반드시 말해야겠다. 내가 2014-2016년에 현지에서 알게 된 러시아 사람들은 세르비아, 영국, 캐나다 등 각지로 떠났다.
나토의 동진에 대한 러시아의 민감한 반응과 크림 반도 및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야욕의 배경 역시 역사·지정학적 맥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미국은 소비에트 연방 해체 당시 구소련 국가들의 나토 가입은 없을 것이라 구두로 약속했지만, 그것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물론 구소련 국가들이 자국의 안보 전략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당연히 있고 그래야만 한다. 그러나 러시아 입장에서는 나토와의 직접적인 대치는 완충지대 상실을 의미하며, 이는 치명적인 안보 위협으로 인식된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나폴레옹 전쟁(조국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대조국전쟁)을 한국 임진왜란 격의 국가적 위기로 기억하며, 유럽으로부터의 침공을 극복한 서사는 오래 전부터 국가 정체성의 핵심을 이루며 로마노프 왕조, 소비에트 시기 및 현재에 이르기까지 정치 선전에도 널리 활용된다. 관련된 역사 서술과 상징물은 러시아 사회 전반에 깊이 뿌리내려 있다. 특히 며칠 후인 5월 9일은 전승일로,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한 1945년의 5월 8일이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이었다. 현재 러시아 각지에는 전승 기념일 준비가 한창이며 길거리에는 관련 상징물이 가득하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가 한 나라나 다름없다는 인식이 왜 여전히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키예프 루시 시대부터의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한국사에서 부여가 고구려·백제의 모체이므로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관점과 같다. 소비에트 시대에 영내의 인구 이동이 흔했으므로 사할린이나 시베리아 같은 극동에서 태어난 현재 30-40대 러시아인조차 부모님이 우크라이나 지방 출신인 경우가 너무 흔하다. 아니, 내 지인 풀에서는 대부분이다. 내 러시아 친구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온 1-2촌 내외의 매우 가까운 직계 존속이 거의 반드시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비에트 붕괴 이래로 현재까지 우크라이나는 명백한 주권국이며, 이에 대한 무단 침공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자 전쟁 범죄다. 수많은 인명 희생을 동반한 푸틴의 전체주의적 권위주의 역시 정당화 불가능하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모두 키예프 루시를 공통의 기원으로 삼고 소비에트 연방 시절 한 국가였던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에는 각기 독립된 주권국으로서 그 지위가 존중되어야 한다. 참고로 벨라루스에는 러시아의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을 정도로 밀접한 공조 관계인 것이 우크라이나의 경우와 다르기는 하다.
여하간, 주권국 우크라이나의 권리를 침탈하는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푸틴 정권은 분명히 잘못했다. 그래도 러시아-우크라이나 갈등의 층위는 서구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보다는 훨씬 복잡하기에 이번에도 결국 구구절절 쓰게 됐다. 나는 이 문제를 외부자의 시각, 즉 방외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서방의 프레임도 러시아의 프레임도 단순히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 온 것이다. 이 시국이라는 말로 남의 행동을 제약하는 것은 한국에서 많이 봐왔는데 딱 싫다. 이건 이거고 그건 그거다. 내겐 러시아는 늘 궁금한 곳 중 하나고, 얼마 전에 러시아 친구들이 한국을 다녀간 현재는 특히 내 개인에게 최적인 여행 시기이다. 당연히 전선 근처에 있는 외교부에서 가지 말라는 지역으로는 가지 않는다.
더하여 난 정치 사안에 대해 현실과 당위를 엄밀히 구별하는 현실주의 시각을 견지한다. 서방은 민주주의와 평화를 표방하지만 실질상으로는 그 언술 역시 자국의 전략적 이익을 뒷받침하기 위한 수단일 때가 많으며 무기 지원 등의 방법 이외에는 딱히 우크라이나에 뾰족한 도움은 줄 수가 없고 그렇게 하려는 의지도 사실상 제한적이라고 본다. 러시아야 뭐 말할 것도 없이 국제법을 노골적으로 위반해 가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자국의 안보적·정치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명백하다.
둘 중 하나의 편을 들어야 한다면, 즉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 서방이지만, 서방도 결코 절대선은 아니며 대체로 자국 이익 위주로 움직인다. 한국은 방외자로서 그 나름대로 양 진영 사이에서 국익을 확보하는 전략을 추구해야 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안보 현실에 비추어 교훈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슬픈 것은, 이 글이 서방과 러시아의 대립 구도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정작 우크라이나는 글 속에서 객체화되어 있고, 충분히 조명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나의 직접 경험과 지식이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임을 밝힌다. 우크라이나 국적자 세 명 정도만을 알고 그 중에 하나는 고려인으로 내 러시아어 선생님 중 하나였다. 언젠가 정세가 안정된다면, 우크라이나의 키이우(러시아 발음으로 키예프)와 벨라루스의 민스크는 꼭 방문하려는 곳이다. 훗날을 기약하며 평안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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