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6월 상트페테르부르크 뒷북 여행기 본문
올해 6월 초 백야 때 스톡홀름이랑 같이 상트페테르부르크도 갔었는데 이제 올린다. 나는 글쓰는 데 진짜 게으르고 특히 여행기 같은 사사로운 이야기는 길게 못 쓴다. 정말로 아름다운 곳에서 잘 놀고 푹 쉬다 왔으니 지금 와서 글로 남기든 말든 아무런 관계 없지만, 사진첩 정리하다 보니까 홀랑 까먹기 전에 조금 남겨놓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네 번째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회사 사람들은 왜 자꾸 러시아를 가냐고 하기 때문에 그냥 스톡홀름 갔다왔다고 했다. 임원 한 분이 내가 러시아 다니는 걸 희한하게 여겨서 소문을 내신다. 사적인 대화 한 마디 해본 적 없는 옆팀 팀장이 그 분한테 들었는지 워크샵에서 갑자기 "그렇게 러시아가 좋으면 주재원 하나 잡아요. 내가 보기에 주재원 와이프가 팔자 최고야." 이러길래 양쪽 귀가 의심되었다. "아, 그럼 저 회사 그만둬야 되는데요...? ^^" 시전했음...
찬란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얘기하기도 바쁜 글에 아재 얘기가 묻었네. 이쯤 해둬야지. 네 번째 가니까 지도가 필요 없었다. 하루에 한두 가지씩만 봐도 충분했고 그나마도 예전에 이미 가본 곳들이 대부분이어서 정말 좋아하는 곳만 골라 느긋하게 둘러볼 수 있었다. 한두 번째 여행할 때는 시간이 없어서 도저히 하지 못하는 카페 방문이나 티타임도 가능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인연이 맺어진 liontamer님과도 세 번이나 만나뵐 수 있었다.
공항으로는 처음 만나본 상트페테르부르크. 핀에어를 타고 스톡홀름에서 헬싱키 반타 공항을 경유해서 풀코보 공항에 도착했다. 이전에 올 때는 항상 항공권을 인아웃 모스크바로 끊고 중간에 밤기차를 타고 와서 3-4일 놀다 가는 식으로 일정을 짰었다. 모스크바-서울 직항편이 있으니 짐 잃을 가능성이 적으니까! 이번에는 처음으로 인아웃을 스톡홀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다르게 끊어서 공항 구경을 할 수 있었다.
6월 8일 수요일,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좀 쉬다가 바로 수프 비노에 갔다. 알렉세이에게 눈인사를 하고 핀스카야 우하를 먹었다. 크림 수프에 야채와 연어 조각이 들어 있는 별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갈 때마다 카잔 성당 뒤편의 카잔스카야 거리에 숙소를 잡고 그 거리의 숨은 명소인 수프 비노에서 하루 한 끼 정도 식사를 한다. 요즘 정말 착하기 그지없는 루블 환율 덕분에 이곳에서 스타터에 파스타에 와인 한두 잔까지 곁들이는 인생 최대의 호사를 누려도 2만원대만 치르면 된다. 여기 핀스카야 우하는 매일 먹으러 오는 동네 단골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정말 맛있다. 직원 알렉세이도 진짜 친절한 사람이다. 두 번째 여행 왔을 때부터 이 집을 알게 돼서 그 후로 올 때마다 항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카라마조프 형제에 나오는 알렉세이 같은 사람이다. 그날 저녁 때 마린스키 극장에서 오페라 <아틸라>를 예매해놔서 미리 준비해온 한역 대본도 여기서 읽고 갔다.
이삭 성당 앞의 니콜라이 1세 기마상. 즉위할 때 데카브리스트 봉기가 일어나서 치세 내내 군주제 붕괴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유럽의 헌병 노릇을 했던 보수 군주다. 유럽의 현상 유지를 목표로 유럽에서 자유주의, 민족주의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그 여파가 러시아에 미치지 않도록 갖은 애를 썼다. 1853년에 오스만 제국과의 사이에서 크림 전쟁이 벌어져 영국, 프랑스, 사르디니아 등 유럽 여러 나라들과도 대적하게 되면서 참패. 맨날 1세인지 2세인지 가물가물하므로 이번에 한번 정리해 본다.
공연 시작 전에 산책을 할 요량으로 일찌감치 나왔다. 금빛 지붕의 이삭 성당을 지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상징, 청동기마상에 닿았다. 흐린 날인가 싶었지만 변화무쌍했다. 갑자기 구름이 걷히고 반짝이더니 어느 새 발밑의 진창도 말라 있었다. 그러다 어느 새 다시 구름이 몰려오고. 이날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두꺼운 회색 양복 재킷의 단추를 풀까 말까 하는 조심스런 신사 같았다.
기분이 좋으면 곧잘 쏜살같이 내달린다. 마린스키 극장으로 달려가다가 발견한 경이로움. 요 작고 똑부러지는 것처럼 어딜 가나 내 자리를 단디 잡고 씩씩하게 살아 내야지. 삶은 어디에나...!
영어 자막이 깔리는 오페라는 항상 신관에서 해주는 것 같다. 마린스키 신관 무대는 이렇게 깃털 장식으로 되어 있다.
공연이 끝나고 기립 박수의 시간. 내겐 해방의 시간이었지.... 드디어 끝났다... 중앙아시아사를 꽤 좋아하는데 아틸라 얘기라길래 한역 대본까지 두 번 읽고 잔뜩 기대하고 갔는데도 중반부 이후 대차게 졸았다. 마린스키 오페라는 가장 호사스럽고 불편한 호텔이 아닐까 싶다. ㅋㅋㅋㅋㅋㅋㅋ
지휘를 맡은 발레리 게르기예프가 보인다. 이 커튼콜마저 빨리 끝나길 바랐다. 나가면 백야의 어스름이 내려 있을 테니까.
마린스키 공연이 끝나면 네바 강변 쪽으로 죽 걸어올라가서 백야를 실컷 구경하고,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에 다시 인사하고 원주 광장에 들렀다가 어둠이 내린 네프스키 대로를 따라 숙소로 돌아가는 것이 습관처럼 돼있다. 올해는 이 루트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사진을 찍었는데 오늘 구글 포토에 저장돼있는 걸 보니까 지운다고 지웠는데도 여전히 많아서 민망할 지경이었다. 하늘빛이 시시각각 달라지는 것이 너무 놀라워서 수없이 많은 셀카를 찍었다. 도스토예프스키나 고골의 정신분열 느낌을 내겠다고 일부러 걸어가면서 흔들어 찍은 것도 많았다.
자정 무렵의 표트르 대제는 이렇게 생겼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쿤스트카메라. 이곳은 표트르 대제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어올리고 나서 최초로 건립한 박물관이다. 두 번 가봤는데 별의별 수집품이 다 있다. 표트르 대제는 기형으로 발달한 인체나 동물 표본을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기 때문에 여기 박제하거나 시액으로 방부 처리한 표본들이 많이 남아 있다. 자기 부하로 키가 230cm 정도 되는 거인이었던 니콜라이 부르주아라는 노예의 거대한 골격도 남아있다.
자정 무렵의 네프스키 대로. 황궁으로부터 방사선으로 뻗어 나가는 직선 대로. 고골과 도스토예프스키와 벨르이의 상상력을 부추겼을 바로 그 곳이다.
어스름 속에 환영처럼 멀리 보이는 피의 사원. 그리보예도프 운하에 어른어른 비쳐 있다.
어둠 속에 열주들이 환하게 빛나는 카잔 성당. 이 뒷길인 카잔스카야 거리에 숙소가 있어서 찾기가 쉽다. 이 카잔스카야 거리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어슬렁거리고 다녔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죄와 벌》을 쓴 곳과 그 주인공인 라스콜리니코프의 하숙집 모델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이 모두 이 거리에서 아주 가까이 있다. 그곳에는 커다란 도스토예프스키 명패가 걸려있고 언제나 시민들이 가져다 둔 꽃이 이슬에 젖은 채 놓여있다.
숙소는 2014년 겨울에도 묵었던 Guest Rooms on Kazanskaya. 부킹닷컴에서 별점 최고 숙소에 등극해 있으니 쉽게 찾을 수 있다. 적어도 두세 명이 쓸 수 있는 방을 나 하나한테 배당해주는데, 물론 방마다 다르겠지만 현재 환율 기준으로 1박에 2-4만원 사이에서 해결 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카잔 성당 바로 뒤편 거리에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다. 직원들도 친절하고 무엇보다 청결하며 공간이 넓어 쾌적하다. 항상 호스텔 도미토리만 가는 저예산 여행자이지만 여기서만은 도미토리 뺨치는 가격으로 호사를 누릴 수 있기에 감사한 마음이다. 마우스 아래에 있는 프린스 잡지는 뉴스위크 스페셜 에디션!! 여행 첫날 스톡홀름 알란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낼름 산 것이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정신없이 읽었다.
아침은 카페 싱어에서 팬케이크. 으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따뜻한 블루베리 시럽 위에서 녹는다. 음식을 앞에 두고 젓가락 아닌 사진기를 먼저 갖다대는 것은 도저히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때는 정말 어쩔 수 없었다.
피의 성당.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자리에 지어진 사원이다. 모스크바에 있는 성 바실리 성당과 함께 러시아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 중 하나. 다음에 또 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서(게을러서!!) 아직 안에 들어가보지는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명물 중 명물인 운하. 어느 운하인지 기억이 좀 가물가물한데 확실히 폰탄카 운하는 아니고, 그리보예도프 운하는 직선이니 아니고, 모이카 운하인 것 같다.
에라르타 미술관에 가서 본 스티브 샤피로의 1960년대 미국 사진들. 숙녀처럼 얌전한 옷을 입으라는 꼰대 할아버지의 설교, 베트남 전쟁 안 나가겠다는 시위, 앨라배마에 마틴 루터 킹 들여놓지 말라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준동. 격세지감 그 자체다.
다정하게 모여앉은 러시아 바부쉬까들. 내 꿈은 동네 어린이들한테 들려줄 재미난 이야기가 많은 코리안 바부쉬까가 되는 것이다. 구성진 욕쟁이면 더 좋음. ㅋㅋㅋㅋ
"수용소 군도는 픽션이야, 그렇지?"
현대미술은 전혀 알아먹지 못하는 나인데도 기대 이상으로 좋았던 에라르타.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Up High라는 제목의 루프탑핑 사진전. 믿을 수 없는 곳에서 흔치 않은 각도로 찍은 기이한 광경의 향연이었다.
키예프 모스크바 브리지 / 프라하
상하이 / 홍콩
두바이 / 뉴욕 맨해튼
홍콩 / 쾰른 성당
홍콩 / 모스크바 표트르 대제 대형 기념물
맨해튼 / 이스탄불 성 소피아 성당
이날 바실리예프스키 섬에서도 꽤 외딴 곳에 있는 에라르타를 가느라 처음으로 뜨람바이(트램)을 탔다. 옛날에 레릭 박물관도 걸어간 적이 있어서 대충 지도를 보고 뭐 이만하면 걸어도 되겠지 했는데 만약 걸었으면 최소 사망 ㅋㅋㅋㅋ 지하철 카드를 찍으면 되는 줄 알고 무작정 올라타서 엉뚱한 곳에 카드를 댔는데 사람들이 아니라고 말렸다. 알고 보니 차장 아주머니한테 현금으로 내고 표를 받는 거였음. 비바람이 귀신 같은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날씨에 오며가며 꽤나 고생했지만 멀리 간 보람은 충분했다.
이날 liontamer님을 처음으로 만나뵈었다. 엄청나게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따뜻한 핀스카야 우하와 송아지살을 배부르게 먹고 나서 조금 재게 걸어 마린스키 극장으로 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미니오페라 <백야>를 예약해 놨었다. 아주 작은 소극장에서 간단히 하는 공연이었는데, 제일 앞줄 배우들 바로 앞에서 보아서 그런지 꽤 많은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용은 보면 볼수록... 어두운 네바 강변과 네프스키 대로에서 되는 대로 흔들리게 찍은 내 귀신 같은 사진들처럼... 도스토예프스키 스타일 그 자체였다.....@_@
그 다음 날은 느긋하게 늦잠을 자고 천천히 나갔다. 숙소는 이렇게 사각형 구조로 되어 있는 일반 서민아파트 단지 안에 입주해 있다. 키를 갖다대면 단지 대문에서 뾰로롱거리는 커다란 소리가 난다. 방 안에 누워 있어도 그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온다.
언제나 빼놓지 않는 러시아 박물관에 또 갔다. 쿠지마 페트로프 보드킨의 초상화. 오랜만에 만나보는 그림이다. 각진 얼굴과 예리한 눈빛, 그리고 이지적인 색조를 좋아한다.
라리사 키릴로바의 초상화. 위에 있는 쿠지마 보드킨의 각진 초상화와는 반대 느낌의 부드럽지만 이지적이기는 매한가지인 인상이 언제나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번에는 엽서 운이 좋아서 뮤지업 샵에 이 엽서를 팔길래 건져왔다.
일리야 레핀의 유명한 작품,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추석 연휴에도 배와 항구에서 온 업무 전화로 잠을 깨는 나는 이 그림을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언제나 숙연하게 참배하듯 보고 또 보고 지나감. ㅋㅋㅋㅋ
가장 좋아하는 레핀의 그림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터키 술탄에게 편지를 쓰는 자포로지예 코사크. 비록 배 스케줄과 상사 퇴근시간에 많이 얽매여 있는 신세이지만 저 코사크 아저씨들처럼 자유를 얻겠다는 일념으로 회사 큐비클에 거의 언제나 붙여놓는 그림이다. 신분에서 계약으로!!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퇴근후)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 ㅋㅋㅋㅋㅋㅋㅋ
아마도 처음 보는 작품. Alexander Gaush의 Peacocks at a Fountain. 부드러운 색감이 인상파 그림을 연상하게 했다.
바실리 베레샤긴의 작품. 중앙아시아와 언제나 긴밀히 연결돼 있었던 러시아에서 오리엔탈리즘 회화는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다. 항상 트레티야코프 갤러리와 러시아 박물관에 갈 때마다 베레샤긴의 회화를 눈여겨 본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제일 좋아하는 성 니콜라이와 성 게오르기 이콘. liontamer 님께서 알뜰하게 기억해 두시고는 얼마 전에 엽서로 만들어서 선물해 주셨다.
이 나라 사람들은 똑똑하고 다정하고 유머있고 진실되고 다 좋은데 왜 이렇게 푸틴을 좋아하지!?!???!!
liontamer님 덕분에 무려 아스토리아 호텔 카페에서 후식을!!! 찻잔을 보고만 있어도 눈이 행복한데 혀끝까지 즐거운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네 번째 간 상트페테르부르크이기에 오후부터 저녁까지 이렇게 긴 여유도 누리고 좋은 분도 알게 되는 것 같다. 한 곳에 여러 번 가야 진정으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러시아 박물관에서 챙겨온 엽서와 스리슬쩍 산 냉장고 자석을 드렸더니 아이처럼 기뻐하셨던 liontamer님. 봉지에 입술 자국을 남겨주셨다!!
백야 때의 일몰 무렵. 빛이 시시각각 믿을 수 없이 변한다. 붉은 빛 아래서 더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이는 표트르 대제의 청동기마상과 네바 강, 그리고 떼지어 날아가는 새들. 이 날도 네바 강변을 걸어 하늘이 깊은 푸른빛으로 타들어갈 때까지 원주 광장을 지나 그리보예도프 운하변을 따라 오랜 산책을 했다. liontamer님 덕분에 좋은 사진으로 많이 남길 수 있었다.
그 다음 날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General Staff Building 쪽으로 들어가면 전혀 줄을 서지 않고도 메인 빌딩과 General Staff Building에 입장할 수 있는 통표를 살 수 있으니 꼭 참고!! 이 그림들은 르네상스 회화의 기법을 응용해서 현대 사회의 외모지상주의나 소비주의, 그리고 알콜 중독을 풍자하고 있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의 General Staff Building에는 물론 칸딘스키, 말레비치, 고갱, 마티스의 명화들도 가득.
에르미타주 본관으로 가면 역시나 옛 대제국답게 고고학 컬렉션도 엄청나다. 위의 다섯 점은 에르미타주의 주요 발굴 성과 중 하나인 타지키스탄 펜지켄트 벽화 일부분. 펜지켄트에 대해서는 예전 글에서 간단히 다룬 적이 있다.
2016/05/06 - [중점추진사업/유라시아사] - 타지키스탄 펜지켄트와 사라즘
신장의 실크로드 지역에서 가져온 벽화도 많다. 주로 쿠차의 키질 천불동에서 가져왔다. 키질 천불동에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추어인 내 눈에도 왠지 키질 천불동의 벽화들은 알아볼 수 있을 것만 같은데, 라피스 라줄리 같은 푸른 색 계통이 많이 사용돼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베를린 달렘 박물관에도 알베르트 폰 르콕이 톱질해서 실어온 키질 천불동의 벽화가 상당히 많이 소장돼 있어서 눈에 익숙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일부 있다. 베를린에 간 이유도 이 키질 벽화를 보기 위해서였지만 다녀온 지 1년이 훨씬 지나도록 글 한편 쓰지 않았네 ^^... 올해가 가기 전에 마무리를 지어야겠다.
다시 에르미타주를 비롯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고고학 컬렉션 얘기로 돌아오자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이외에도 세르게이 올덴부르그가 막고굴에서 가져온 둔황 문서 역시 만 점 이상 꽤 많이 있다. Institute of Oriental Studies (IOS) 라는 기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이 이 관련 분야 연구의 중심지다. 에르미타주 박물관 안에도 둔황 막고굴에서 가져온 유물이나 벽화가 조금 있는데, 둔황 전시실에서는 그 어떤 사진도 찍지 못하도록 했다. 벽에 걸려 있는 설명 텍스트조차 사진찍지 못하게 해서 원하는 사람은 필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어로 돼 있는데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럴 엄두는 내지 못했다.
쿠차에 대한 예전 글들은 아래에.
2016/05/07 - [중점추진사업/유라시아사] - 에르미타주 박물관 중앙아시아 전시실 소개글
2016/05/02 - [중점추진사업/유라시아사] - 토하리어A, 토하리어B 관련 발췌
요것은 투르판의 베제클리크 천불동에서 세르게이 올덴부르그가 뜯어온 것이다. 내가 직접 갔을 때 이 천불동은 거의 텅텅 비어있었다. 위에 말한 독일의 알베르트 폰 르코크 탐험대가 거의 대부분을 싹둑싹둑 톱질해갔고, 일본 오타니 탐험대도 많이 가져갔는데 그 일부가 국립중앙박물관에도 많이 전시돼 있다. 오타니가 이 탐험에 돈을 많이 써서 일부를 팔아 넘기는 바람에 유물이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입수자 중 하나가 조선의 광산 채굴권을 얻으려고 데라우치 마사타케 조선 총독한테 기증을 했다. 일본 패망 때 미처 챙겨가지 못한 유물들이 여기에 그대로 남아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컬렉션이 된 것이다.
쓰다 보니 좀 스압이긴 하지만 그냥 한 편으로 다 맺어버렸다. 아마 당시에 바로 썼으면 뭔가 더 절절했겠지만 시간 지나고 나서 담담히 쓰는 맛이 있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번에 네 번째로 가서 미련없이 즐기고 온지라 당분간 안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사진을 보면서 되새기다 보니 또 가고 싶다. 이만큼 아름다우면서도 여러 가지 애호를 훌륭히 만족시켜 주는 곳은 정말 흔치 않다. 진창 위에 지어진 제국 수도라는 역사 자체가 드라마틱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들이 영감을 얻고 활발히 글을 썼던 도시이다. 처음 봤을 때 경외감으로 얼어버릴 듯했던 그림들이 가득 들어찬 러시아 박물관이 있다. 경이로운 교향곡과 오페라가 이 곳에서 쓰였고, 도저히 입을 다물 수 없게 만드는 발레 작품들이 이곳에서 만들어져 첫 무대에 올랐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기관에는 중앙아시아 역사와 고고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놓칠 수 없는 일급의 컬렉션이 마련돼 있다. 러시아어를 잘하게 되면 수많은 러시아 탐험가와 학자들이 남긴 문헌을 구해 읽을 수도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이 모든 것을 갖춘 놀라운 도시다. 네 번 갔지만 가도 가도 새로운 게 보여서 매번 매료되고 마는 위험한 토끼구멍이다. 내년에 또 가지 않도록 애를 써볼 것이다. 다른 데 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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