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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칼미키아 공화국

bravebird 2015. 7. 26. 23:37

러시아 연방 소속의 칼미키아 공화국이라고 들어보셨나요? 가끔 국제토픽에 나오고는 해요. 이곳 공화국 수반이 체스 매니아이자 국제 체스연맹 대표로 유명하답니다. 그래서 수도 엘리스타에는 체스에 관한 상징물이 많아요. 학교 수업 시간에도 체스를 배울 정도이지요. 그렇지만 칼미키아는 무엇보다 유럽에서 유일하게 불교, 그 중에서도 티베트 불교를 믿는 독특한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유럽에서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불탑 앞의 체스 상징물



칼미키아인은 서몽골 오이라트에 속합니다. 스스로를 오이라트인이라고 칭해요. 몽골도 여러 부족이 있는데 그 중 서쪽 사람들인 셈이에요. 현재의 몽골 공화국과 중국의 내몽고 자치구는 동몽골에 속했습니다. 이 동몽골을 할하 몽골이라 하고, 이것이 할하와 차하르로 나뉘어졌어요. 현재 외몽골이 주로 할하부, 내몽골은 차하르부 거주 지역이었다고 합니다. 이 동몽골뿐만 아니라 서몽골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오이라트였어요.


오이라트부는 준가르와 호쇼트, 데르베트, 토르구트의 네 부족으로 이뤄진 부족연맹체였습니다. 주로 현재의 중국 칭하이성,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천산 근처, 고비사막 서쪽, 알타이 근처 등에 살았던 사람들이에요. 몽골 자체가 이미 성조 쿠빌라이 칸이 활약한 무렵에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인데다, 티베트와 가까운 동일한 초원문명권에 속해서 문화적으로 가까웠어요. 그래서 지금까지도 몽골 사람 중에는 티베트 불교 신자가 많이 있어요. 



 크게 보시려면 클릭하세요. Khalkha Mongols, Chahar Mongols, Oirat에는 노란색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청조 강희제 시기에 갈단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의 등장을 계기로, 이 네 부족 중 준가르라는 집단이 크게 성장합니다. 강희제는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명군 중 하나로 일컬어지지요. 강희제는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대단한 정치적 수완을 바탕으로 삼번의 난을 평정하고는 황권을 굳게 세웠어요. 여세를 몰아 대만도 청조 판도에 포함시키는 등 가공할 업적을 세웠습니다. 서북 변방지역 영토 개척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고요. 이처럼 세계 최강대국의 유능한 황제였던 강희제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한 것이 바로 갈단이 이끈 오이라트부 준가르 부족이었습니다. 강희제는 3번의 원정을 거쳐서 갈단 세력을 공격하고 갈단은 패주하다가 죽음을 맞이합니다만,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준가르 자체는 이때가 아니라 건륭제 때나 되어서야 멸망합니다. 이 이야기는 워낙 장구하고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별도의 포스팅을 몇 번이나 해도 모자랄 지경이랍니다. 이 전쟁 이야기를 옛날얘기 하듯이 술술 읊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제 목표이기도 해요. 



갈단의 초상화



이 준가르가 차차 커갈 때쯤, 1600년대 초에 토르구트 사람들이 볼가 강 유역으로 대거 이동을 했어요. 현재 칼미키아 공화국이 있는 바로 그곳이지요. 카프카스와도 아주 가깝습니다. 대장정을 거쳐 제정러시아의 변방에 해당하는 그곳에 정착을 마쳤지만, 당시 영토야욕이 컸던 러시아의 요구사항이 만만치 않았어요. 결국 토르구트는 준가르 멸망 즈음에 청조 건륭제의 귀환 초청을 받게 되고, 옛 고향땅 신장으로 집단 귀환을 결정합니다. 이 귀환길에 러시아군, 카자흐 기병대, 그리고 통과 지점에 살고 있는 키르기스 등 다른 유목민들, 게다가 기아와 추위와 전염병까지 공격해와 처음의 17만 명 중 7만 명만이 신장 이리에 닿을 수 있었어요. 토르구트 눈물의 귀환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사건입니다. 건륭제는 이 온갖 수난을 이겨내고 청조의 품안으로 되돌아온 토르구트인을 기리고자 귀순비도 만들어 세웠지요. 이때 신장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볼가 강 유역에 그대로 남은 이들이 바로 칼미크인입니다. 이름 자체가 '남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라고 해요. 이들 덕분에 현재 칼미키아 공화국이 유럽 유일의 불교 공화국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에요. 



칼미키아 공화국 위치. 우랄 산맥의 서쪽이자 카스피 해 서쪽이므로 유럽 지역으로 분류됩니다.




점선 화살표가 토르구트의 서천 경로, 빨간 점선 영역은 토르구트의 이주 후 목초지 영역, 파란 점선 영역은 제정러시아의 포위 영역, 빨간 화살표는 신장 이리 지역으로의 귀환 경로, 파란 화살표는 제정러시아군의 공격 루트입니다.



저는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하던 당시, 이 오이라트 이야기를 포함한 중국 서북 변방사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위구르어를 배우기도 했고 신장과 간쑤 지역을 한 달 이상 여행하기도 했고요. 이전에 중국사 쪽에서 접근해 들어갔을 때는 "강희제가 갈단을 패주시켰다" 혹은 "십전노인 건륭제가 서북 변경을 정벌하여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계승한 영토 판도를 만들어냈다" 정도로 짧게 이해한 것이 끝이었지요. 이때 처음으로 오이라트를 거의 주인공 삼아 주변의 청나라, 러시아, 몽골, 티베트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서술한 역사책을 접했습니다. 피터 퍼듀가 지은 《중국의 서진》이 바로 그것이에요. 아주 두껍고 탁월한 명저이지요. 매우 부끄럽지만 그 이후부터 졸업 준비에 취업에 직장생활에 쫓기다가 아직도 끝을 못 봤답니다. 마크 엘리엇의 건륭제도 대략 비슷한 범위를 꽤 상세히 다루고 있고 역시 아주 흥미진진한 책입니다. 미야와키 준코의 《최후의 몽골유목제국》도 정확히 이 오이라트에 초점을 맞춘 저서입니다. 


이전부터 러시아 문학을 아주 좋아했지만 감히 러시아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때 오이라트 역사를 읽고서 러시아어를 반드시 배워야만 하겠다는 결심을 처음 했어요. 중앙아시아 초원사를 이야기하면서 중국어와 러시아어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기본 언어라는 걸 절감했거든요. 그로부터 2년 지난 2014년, 첫 취직 후 직장 생활이 안정되어갈 때쯤 러시아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휴가를 틈타 러시아에도 종종 다니기 시작했고, 이제 러시아는 뭐, 발을 하도 깊이 들여놓아 더 이상 빠져나오기 어려운 그런 토끼구멍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첫 장면에 등장해서 앨리스에게 진기한 경험을 선사해준 바로 그 토끼구멍이요.


그만큼 오이라트 이야기는 저와 러시아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준 1등공신입니다. 교환학생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오이라트 이야기를 알게 되었는데, 귀국 후에는 졸업 준비하랴 취직 준비하랴 여유가 없었어요. 깊게 파고 들어가보지 못한 아쉬움이 못내 남아있어요. 나와있는 책들이 좀 가볍고 쉬우면 편할 텐데, 책이 많지도 않고 나와있는 책은 아주 두껍고 내용의 밀도가 높아요. 낯선 인명과 지명 때문에 펜을 들고 줄을 쳐가며, 컴퓨터를 켜놓고 검색을 해가며 천천히 여러 번 읽어야만 제대로 따라갈 수 있어요. 저는 대부분의 독서를 출퇴근길 지하철 안에서 해결하며 집에 오면 이미 잘 시간이랍니다. 그런 일상 속에 끼워넣기가 간단치 않은 분야이지요. 하지만 오이라트와 청조 역사를 찬찬히 짚어 봐야겠다는 각오만은 언제나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던 중, 모스크바에서 아주 많은 칼미키아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게 되었습니다. 저번 겨울에 처음 알게 되었고 이번 여름에 또 만나게 되었어요!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을 게 분명합니다. 그 칼미크 친구들의 이야기가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이전 여행기에서 이 칼미키아 친구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곳종종 역사글 읽으러 들어가는 블로그인데 오이라트에 대한 글이 재밌어요. 칼미키아 관련 검색결과만 모아놓은 페이지입니다. 

- 이곳은 '유럽의 유목민들'이라는 시리즈가 올라와 있는 블로그에요. 그 최종회가 바로 칼미키아 이야기입니다. 문자 그대로 유럽 최후의 유목민족이었던 칼미키아 이야기를 읽어보세요. 여기 나오는 칼미크 승려 그림은 제가 좋아하는 화가인 니콜라이 레릭의 작품이랍니다. 

- 다른 블로그의 이 게시물도 재미있어요. 신기한 게, 블로그 주인장님 프로필 사진이 저랑 똑같이 독수리 사진이에요.

- 이건 토르구르 귀순비에 대한 중국 웹 기사인데 앉은 자리에서 읽어내리기엔 부담이 되네요. 무엇보다 비문은 고전 한문으로 쓰여 있고요. 언젠가 기회가 되고 내공이 되면 천천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비석 모양이라도 한번 구경해 보세요. 

- 건륭제에게 있어 토르구트의 귀환은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청조의 헤게모니적 입지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거든요. 이 페이지에서는 건륭제 시기에 집필된 《어제토르구트전부귀순기(御制土尔扈特全部归顺记)》 이미지들을 살짝 들여다볼 수 있어요. 역시 중국 웹에 한문이라 아쉬움이 남지만, 언젠가 기회를 만들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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