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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런던 영국도서관 방문기

bravebird 2016. 9. 4. 01:04



만일 대영박물관의 서가에서 진실을 찾을 수 없다면 진실은 과연 어디 있겠느냐고 나는 공책과 연필을 집으며 자문했지요. (...) 회전문이 휙 열리자 거대한 둥근 천장 아래로 들어서게 되었지요. 나 자신이 마치 일단의 유명한 이름들로 화려하게 에워싸인 거대한 대머리 속에 들어간 한 가지 사소한 생각처럼 느껴졌습니다. 카운터에 가서 종이 한 장을 받아 들고 도서 목록을 펼쳤지요. 그리고 . . . . . 이 다섯 개의 점은 망연자실하고 어리둥절했던 그 오 분을 각각 나타내는 겁니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영국도서관에 들어섰을 때의 어안이 벙벙했던 느낌은 이 정도면 전해질까. 거대한 메인 홀의 중앙부 몇 층이 저렇게 장서로 가득차 있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영박물관 부속도서관과 다른 여러 도서관을 통합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대영박물관의 서가는 이곳을 말하는 걸로 봐도 무방하다. 이번 런던 여행에서 8월 15일 월요일과 16일 화요일 이틀에 걸쳐 이 영국도서관을 방문했다.


가기 전에 인터넷으로 사전 등록을 해서 계정을 만들고 방문 약 이틀 전까지 자료 신청을 해놓으면 스터디룸으로 가져다준다. 다 해놓고는 신청자료 목록을 뽑아서 가지고 갔다. 사전등록자도 일단 첫 방문을 하면 실물 리더패스를 받아야 하는데, 이때 간단한 신분 증명과 방문 목적에 대한 인터뷰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 인터뷰 때 신청자료 목록을 제출하면서 답변을 드리니 준비성이 좋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셨다. 신분 증명을 위해서는 내 서명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과 주소지를 증명할 수 있는 번역공증 자료를 챙겨서 가면 된다. 이렇게 리더패스를 받고 나면 지하실에 짐을 맡기고 비닐백에 필요한 물품을 넣어서 스터디룸으로 올라갈 수 있다. 


내가 간 곳은 아시아-아프리카학 스터디룸이었고 그 내부에 사진 열람실이 있었다. 이 사진 열람실에 미리 이메일을 보내서 월요일, 화요일 아침 시간 각 3시간씩 약속을 잡아둔 다음에 자료 검색을 하고 바스켓에 넣어두었다가 최종 신청을 했다. 하루에 총 열 가지 자료를 신청 가능해서 사진 앨범과 단행본 총 스무 가지를 예약했더니 날짜별로 고스란히 준비해 놓았다. 






주로 인도에 주재하면서 신장을 탐험했던 영국 관리나 학자들의 당시 사진이 많다. 옛날 대영제국 식민지이거나 세력권이었던 홍콩, 마카오, 시킴, 티베트, 부탄, 카쉬미르 지역의 옛날 사진도 많이 신청했다. 사진은 질릴 만큼 많이 보고 폰카로도 많이 찍어 왔는데 인터넷상에 올리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 개인 소장용으로 가지고만 있다. 


특히 오렐 스타인의 제3차, 제4차 중앙아시아 탐험 사진을 많이 봤는데 커다란 상자로 그득그득했다. 미란 탐험, 누란왕국 옛터 탐사 같은 말로만 듣던 굵직한 사건들 당시의 100년도 넘은 아날로그 사진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정말 신기했다!! 영국은 정말 이 지구의 별의별 지역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재원을 투자해서 탐사대를 보내고 자료를 모아 엄청난 데이터베이스를 만든 대제국이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영국도서관은 전세계를 파악하겠다는 옛 열망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지식욕이란 건 지배욕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출간된 지 몇십 년이 넘은 옛 단행본도 간단한 주문 절차만으로 빌려볼 수 있다. 1971년에 발간된 C. P. Skrine이라는 정부 관료이자 투르키스탄 탐험가의 Chinese Central Asia라는 책을 신청해서 서문 정도 조금 읽어봤다. 문어체 영어는 전통이 길고 확립된 지 꽤 오래 되어서 그런지 지금의 영어와도 괴리감이 없이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1970년대에 나온 한국 책은 소설만 읽어봐도 문체가 완전히 구닥다리 느낌인 것과는 영 딴판이다. 그 다음 여행지인 파리에서 제1순위로 방문할 국립 기메 동양학 박물관과 폴 펠리오 컬렉션에 대한 책도 간단히 훑어봤다. 


둘째 날에는 메인 홀에 있는 Sir John Ritblat Gallery도 챙겨 방문했다. 이곳에 영국도서관의 보물과도 같은 소장품들이 전시돼 있다. 입장료는 여느 수많은 영국 국립박물관처럼 무료다. 여기 바슬라프 니진스키가 작성한 목신의 오후 안무용 악보가 있고, 드뷔시와 바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의 여러 악보도 전시돼 있다. 스타인 금강경은 아니지만 676년도에 인쇄된 금강경 한문 번역본도 있다. 전세계에서 하나뿐인 베오울프 원전도 여기에 있고, 전세계에 단 7권 남아있고 그 중 영국도서관에 5권 소장돼 있다는 앵글로색슨 연대기 중 1권도 여기 있다. 무려 대헌장도 이곳에 있


대제국 영국이 전세계를 들쑤시며 축적한 수많은 자료, 그중 기록유산은 이곳에,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그득하다. 제국 경영자였던 선조들이 열심히 노략질(?)을 한 덕분에 런던 시민들은 세계 최고의 도서관에서 엄청난 범위의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셈이다. 굉장히 얄밉기도 하지만 제국 경영이 아니었다면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이만한 도서관이 생겨날 수 있었을지, 각 지역학이 지금 수준만큼 분화되고 발전할 수 있었을지 의문인 것도 사실이다. 이건 오렐 스타인과 같은 중앙아시아 유물 약탈자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똑같이 해볼 수 있는 질문이다. 그래서 나는 어땠냐고?  리더패스는 1년짜리다. 만료 전에 다시 와서 실컷 자료를 보고 싶었던 마음, 고백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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