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디아스포라의 지식인 읽는 중 본문
이 책은 홍콩 태생으로 북미 학계에서 일하고 있는 레이 초우라는 학자가 썼다. 홍콩에서 인류학/사회학 공부를 해보려고 연구계획서를 쓰던 몇 년 전에 정말 궁금했던 책이다. 그쪽보다는 문학/문화연구 쪽에 가까운 책이라 당시에는 제쳐 놨다가 이제서야 읽는데 너무 어렵고 괴로워서 휙휙 넘기고 있다. 대신 와 이건 제대로다 싶은 부분도 꽤 있어서 덮지는 않았다. 대학원 생각까지 하면서 문학을 두 과목이나 전공하던 내가 왜 졸업을 끝으로 문학과 담을 쌓았는지 이 한 권으로 설명이 가능하기 때문에 끝까지 읽을 것이다.
고등학교 때 80년대 홍콩 영화를 보다가 반환, 그러니까 식민통치 종식을 앞둔 사람들이 그걸 오히려 너무 두려워하는 모습을 봤다. 일제강점기 역사에 이를 부득부득 가는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는 진실로 진실로 신기한 광경이었고 홍콩의 역사는 정말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부터 식민지 경험이 있는 곳의 사람들이 그 역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해서 궁금증이 생겼다. 이것 때문에 중심과 주변, 제국과 식민지, 남성과 여성 같은 대립 체계에 대해서도 많은 주의를 기울이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탈식민주의라는 문화 이론에서 이 주제를 다룬다는 걸 알게 됐다. 관련된 영문과 수업을 들어봤더니 영문학계에서 탈식민주의는 말 그대로 핫한 메인스트림 연구대상이 틀림없었다. 주저없이 영문학을 복수전공으로 선택했다. 본 전공은 국문학인데 일제강점기가 주된 연구 주제인 학문이다 보니 역시 식민/탈식민 문제를 다뤘고, 애초에 홍콩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한국과의 비교 때문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이외에 전공은 아니었지만 중국사에도 큰 흥미를 느꼈는데, 제국과 그 주변부의 역동적인 관계를 생생히 볼 수 있는 분야여서 그랬다. 특히 메이저인 서양사가 아니라 주변부 역사인 동양사이기 때문에 학문적 식민화(중국사 전공인데도 미국에서 학위를 따야 인정을 받는다든지) 현상을 볼 수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일단 이 책을 집어들게 된 내 지난 10년간의 배경은 이렇고, 그걸 바탕으로 독서 중 느끼는 점들은 아래와 같다.
1. 이 분야 자체가 너무 난삽하다. 문학 비평서나 문화연구 학술서에는 사변적인 용어나 논의들이 심히 많다. 레이 초우는 아시아 문학이 북미 제도권 교육 속에서 게토화되는 현실에 대해 지적하고 있는데, 이 의견 자체는 아주 유효하고 타당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바로 뒤에서 힘이 닿는 한 좀더 이야기해 보겠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이 문화연구 분야, 특히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외계어 같은 용어나 추상적인 이론도 이 학문을 게토화시키고 있다. 이민성(migranthood), 탈영토화(deterritorilization), 타자성(otherness)... 너무 억지로 만든 용어들 같고 아무리 쳐다봐도 잘 모르겠다. 이쪽 분야 책에서 언제나 인용하는 호미 바바의 논문은 예전에 세미나에서 읽으려고 시도해 봤지만 도저히 이해가 안됨... 안할래...
2. 저자가 지적한 대로 아시아 문학이라는 분야 자체가 너무 게토화되어 있다. 외국인들이 읽을 프로필에 좋아하는 책을 적을 때 나는 한 권의 한국 책도 올려놓을 수가 없다. 전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끔 외국 친구들한테 국어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하면 한국문학에 대해서 얘기해달라고 하거나 재밌는 작품을 추천해달라고 하는데, 도저히 막막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일단 번역 소개 자체가 거의 되지 않아서 작가나 작품이 전혀 알려져있지 않다. 나는 최인훈의 회색인이나 염상섭의 삼대가 진짜 명작이라고 생각하는데, 배경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한테 설명해 주자니 줄거리를 구구절절 풀면서 역사 얘기까지 해줘야 이해를 할동 말동 할 텐데, 낯선 인명과 지명으로 가득찬 얘기를 해주면 분명히 흥미를 잃을 것이다. 정말 난감하다. 한국문학을 참 재밌게 읽었지만 어디 나가서 재밌게 얘기할 수는 없는 이 안타까움!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고 있으니 한국어를 할 줄 아는 것은 마켓에서 일종의 스펙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이 놀랄 만큼 늘어나기도 했다. 그렇지만 케이팝 수준을 넘어선 이 나라 역사나 문화 혹은 문학에 대해서 관심이 미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 우리끼리만 여기 앉아서 우리끼리만 읽을 어려운 논문을 생산하고 있으면 한국문학은 영원히 그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타개해 보겠다고 외국 학계에 진출해서 외국어로 연구를 한다고 해도 마이너 신세를 면치 못할 게 눈에 보인다. 내가 미국에 가서 염상섭 문학이나 한국어 조사 은는이가에 대해서 연구를 한다면, 얼마 되지도 않을 논문 독자들은 그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므로 줄거리 요약만 하기에도 바쁠 것이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제대로 된 연구는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어국문학 연구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좋은지 도저히 스스로 답을 낼 수가 없어서 대학원 생각을 꽤 오래 해봤었지만 접었다.
3. 탈식민주의 연구자들의 태도에서 자기모순이 너무 잘 보인다. 나는 홍콩의 후식민 현상에 대해서 고등학교 때부터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고, 이 도시의 사이즈나 특수성 면에서나 정말로 연구해볼 만한 곳이라 생각했다. 게다가 국문과와 영문과에서 발전시켜온 관심 주제들의 뚜렷한 연장선 상에 있었다. 홍콩 대학원에서 공부를 해보겠다고 결심을 내리고 영문과 교수님들께 추천서를 부탁드리러 갔다. 이 두 분은 모두 수업에서 탈식민주의를 중점적으로 다루셨으며, 호기심을 갖고 열심히 수업에 참여하는 내 태도를 높게 평가해 주신 분들이다. 그런데 홍콩 연구를 하겠다고 찾아갔더니 굉장히 의아해하면서 마지못해 추천서를 써주셨다. 아마 홍콩은 학문 권력의 중심에 있지 않은 곳이라 내 현실적 미래를 염려해서, 내 연구도 게토가 되어버릴까봐, 선배로서 학계 사정을 직접 겪어 보셔서 그랬을 것이다. 미국의 명문대에서 메인스트림에 속하는 연구를 하지 않으면 학계에 자리잡기가 힘든 게 사실이니까. 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탈식민을 이야기해서 테뉴어를 따고 논문을 쓰고 학생을 가르치는 분들이 실제로는 그걸 그다지 절실히 믿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충격은 상당했다. 속은 느낌. 그리고 탈식민 연구조차도 철저히 식민화돼 있는 현실에 대한 무력감.
레이 초우는 이 책에서 말했다. 좀 길게 인용하게 될 것 같다.
오리엔탈리즘이 반드시 백인의 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주의자 역시 반드시 인종적으로 '백인'은 아니다. '백인의 죄'라는 말은 계속해서 권력과 결여를 서로 대치시키는 담론유형을 가리키는데, 그 담론의 화자는 제인 에어처럼 권력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무력한 것과 동일시한다. 이는 특권층 출신조차 특권의 '결여'라는 입장에서, 결여에 대해, 결여로서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연유를 설명해준다. 마오주의자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원을 끌어내면서도 자신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산적 순환이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항상 자기담론의 물질적 기반을 은폐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순수하게 탄생한 것처럼 말한다. (pp.31-32)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단지 자신의 보물이 녹슬어버리는 것을 한탄하는 '제1세계'의 오리엔탈리스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과 비서양을 막론하고 특권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와 학생들도 문제인데, 이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의 사회적 출신에 어울리는 엘리트주의에 따라 행동하지만(예컨대 혼인을 통해 권력을 얻고, 명성을 추구하고, 동료 학자를 경멸에 찬 오만함으로 대하는 등), 그럼에도 '서발턴 구제'에 헌신할 것을 공언한다. 나는 그들이 특권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거나, 그들이 부자와 결혼하고 명성을 추구하고 심지어 오만해져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의 논점은 그들이 타인의 무력함 속에서 자신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며, 자기 발언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이 폭력과 공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마오주의자의 후예들은 19세기 영국의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동양은 하나의 경력이다"라는 발언의 폭력성을 재빨리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정작 자신들이 '동양'을 경력 쌓기의 도구로 삼으면서 생기는 폭력성은 외면하고 있다. (p.32)
우리는 지식인들의 싸움이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싸움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체제적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적과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지배의 중심부 또는 주변부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짓밟힌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도 분명 아니다. 따라서 학계의 지식인이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었다'(또는 피억압자와의 연대 속에서 자신이 희생당했다)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반체제적' 담론에 의해 축적되는 권력·부·특권이며, 자신의 말이 공언한 내용과 그런 말로부터 자신이 얻는 신분상승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푸코가 지식인은 권력의 대상과 도구가 되는 것에 저항하여 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 결여로서의 타자에 대해 줄기차게 말하지만 봉급과 사례금이 계속 올라가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왜 믿어야만 하는가? 반체제적 담론의 의도가 기성체제에 의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대체하고 부인하는 것일진대, 그 담론 자체가 적정한 것으로 전화되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pp.35-36)
이상 적은 세 가지 이유로 안타깝게도 학문으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는 흥미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어디 가서 문학 전공이라고 말하려니 이질감이 느껴져서 어학이 더 좋았다는 단서를 붙이고는 한다. 학문으로서의 문학은 비평에 메타 비평에 자꾸 부산물만 생산해내다가 현실세계와의 고리를 잃어버린 것 같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 책도 문학/문화연구에 정이 떨어져버린 바로 그 이유인 난삽함 그 자체이지만, 내 지난 행적을 뒤돌아보기에 좋은 매개가 되어주었다. 읽으면서 머리가 깨질 것 같긴 하지만 위의 세 포인트는 명쾌하게 정리가 되어서 읽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쓰고 보니 문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그리고 스승님들에 대해 아주 호되게 평가해버린 글이 되어버렸지만 지나온 길을 한번쯤은 솔직하게 정리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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