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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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점추진사업/내륙아시아

랭던 워너 가족 만난 이야기

bravebird 2017. 4. 3. 20:36
심히 일이 없으므로 심심함을 금치 못하여 메모장에 딴짓을 한다. 오늘은 랭던 워너와 내가 만난 그 가족 이야기를 조금 더 써보겠다. 사실 진작에 썼어야 할 이야기지만 게으른 관계로…




랭던 워너(Langdon Warner). 미국 매사추세츠 태생의 동양미술학자로 인디애나 존스의 모델이 된 인물 중 하나다.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을 보면 기차에 치어 죽을 뻔한 사람을 잽싸게 구해내고 표표히 사라지는 폭풍간지를 지녔던 분이다. 내 친구의 외증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친구의 얘기에 의하면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 《롤리타》의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와도 교류가 있었던 듯 하다. 윌리엄 제임스는 확실하고 나보코프 부분은 조금 가물가물한데 나중에 물어봐야겠다. 여하간 그 시대 사람이었다. 

랭던 워너는 하버드에서 불교 미술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일본과 중국 미술을 가르친 최초의 학자이다. 하버드 포그 박물관의 동양미술관에서 큐레이터를 맡기도 했다.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고, 일본 문화재를 염려하여 원자폭탄 투하를 반대했다. 지금도 도쿄 인근의 이바라키 현, 가마쿠라 시, 나라의 호류지를 비롯한 일본 각지에 랭던 워너 기념비가 있다.


가마쿠라의 랭던 워너 기념비. 클릭하면 확대.


랭던 워너는 둔황 막고굴에서 벽화를 절취한 거의 마지막 서양인 탐험가였다. 워너 이후에는 중국이 빗장을 걸어잠궜다. 위키피디아 페이지를 보면 가족 중 일부가 하버드 박물관에다가 둔황 문화재를 중국에 반환하라고 요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박물관 측은 랭던 워너가 해당 문화재를 적법한 절차로 입수했으며 관련 영수증까지 갖고 있다면서 거절했다. 친족들은 그 점도 일단 수긍하고 해결책을 찾는 중이다.


하버드 미술관에 가면 이분이 가져온 아름다운 둔황 미술품이 있다. 내가 보스턴에 갔을 땐 하필 개보수 중이어서 볼 수 없었다. 최근에는 랭던 워너의 개인 소장 미술품 컬렉션이 발견됐다. 가족들이 하버드 대학 포그 박물관에 전부 기증했다. 친구도 여기에 관여해서 올해 초 보스턴에서 사진을 죄다 찍어 보내줬다.


Kneeling Attendant Bodhisattva (랭던 워너가 둔황 막고굴 328굴에서 가져온 불상. 현재 하버드 포그 박물관 소장.)


이 친구는 교환학생 당시에 나랑 중국어 수업이랑 티베트-몽골관계사 수업을 같이 들었다. 학교 첫날부터 어학반 배치테스트 대기 장소에서 사람들 캐리커처를 그리는 걸 봤는데 영락없는 너드였다. 딴 반에서 우리 반으로 옮겨온 직후에도 찍찍 소리나는 사인펜으로 선생님 캐리커처를 그리고 앉았길래 미친 놈인 줄 알았음. 알고 보니 지독한 중앙아시아 역덕이었다. 우즈베키스탄에 쿠데타 일어난 시기를 포함해서 방학마다 자비로 중앙아시아를 도보 여행할 만큼 여행 경력도 많았다. 신기하게도 외증조할아버지랑 비슷한 길을 간다. 만화도 잘 그리고 언어도 여러 가지 구사하고 재능이 많다. 글도 내가 좋아하는 간결하고 담담한 스타일로 잘 쓴다. 처음 말을 틀 때 "You're a character"라고 했더니 너도 마찬가지라며(...) 내가 할말이 없어지잖아 껄껄...? 그렇게 친해졌다 ㅋㅋ


마침 그때 위구르어를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겨울방학 때 신장에 갈까 생각 중이었다. 이 친구도 신장 이리에서부터 둔황까지 잇는 도보여행을 마저 할 거라고 했다. 행선지가 비슷해서 둔황에서 만날 수 있었다. 막고굴에서 그 유명한 장경동에 같이 입장했다. 장경동은 오렐 스타인과 폴 펠리오가 문서를 많이 빼돌린 곳이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서 나왔다. 여기서 중국인 가이드가 랭던 워너 얘기를 마침 꺼냈는데, 친구가 자기네 증조할아버지라고 해서 잊히지도 않는다.

그 해 말에 이 친구랑 가족들을 만나러 보스턴에 갔다. 이 가족 전체가 하버드 출신이라 친구는 보스턴 토박이다. 그 중 친구 아버지는 심지어 교수로 계셔서 아름답게도 도서관 패스를 발급해 주셨다. 덕분에 하버드 중앙도서관(와이드너-퓨지 도서관)이랑 옌칭연구소에서 대학원생인 척 하며 실컷 책을 빌려 읽었는데 와 진짜 그 도도하고 압도적인 아우라의 서가는 도저히 잊을 수 없다. 하버드 도서관은 1920년대에 나온 책도 학생들한테 빌려준다. 온갖 언어로 된 책을 다 사들이기 때문에 웬만한 건 다 구할 수 있다. 와이드너-퓨지 도서관 서가를 보니까 왜 다들 미국에 유학을 가려고 하는지 '물리적으로' 몹시 이해가 됐다. 도서관 장서량을 생각하면 나도 간절히 미국 유학을 가고 싶다.




랭던 워너는 이 친구 어머니의 할아버지였다. 친구 어머니는 예일 대학에서 러시아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후 변호사가 되셨다. 60년대 말 70년대 초쯤 학부생이셨던 것 같으니 미소관계가 아주 그냥 볼만하던 시절에 러시아학을 공부하신 셈이다. 대학 가기 전 질풍노도 시절엔 핀란드에서 노동자 생활도 하셨다고 한다. 대학생 때는 운동선수로 활동하셔서 무려 올림픽 메달리스트이시다. 랭던 워너의 아들이자 내 친구의 외할아버지는 해양 기술자이자 악기 기술자였다. 이 분이 다른 분과 공동제작한 하프시코드가 비틀즈 음악에도 쓰였다. 트럼펫을 좋아해서 숨 불어넣는 소리인 '움파'라는 별명으로 불리길 좋아하셨다. 이렇게 이 가족은 뉴잉글랜드에서 잘 교육받은 진보적인 전문직 엘리트 가정이었는데 다들 재능이 남다르고 먼 곳에서 온 손님을 기쁘게 맞아주셨다. 건강히 잘 지내고 계셨으면 좋겠다.

지금 친구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학부 전공을 계속 이어서 동아시아 역사를 전공한다. 티베트, 몽골 역사, 중국의 장성 근처에 흩어져 있는 요새 마을의 구조와 생태에 관심이 많다. 요즘은 티베트어에 이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느라 여념이 없는 듯 하다. 공부하다가 간간이 재미있는 읽을거리를 보내준다. 
 
랭던 워너 본인에 대해서는 아직 좀더 조사가 필요하다. 친구가 보내준 자료도 못 본 것이 더 많다. 올해 여름 휴가는 핀란드와 네덜란드에 가기로 했는데, 핀란드의 구국영웅인 구스타프 만네르하임 전 대통령도 러시아 군복무 시절에 실크로드 탐험가였기 때문이다. 만네르하임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틈틈이 랭던 워너 이야기를 써놓을까 한다.


■ 참고문헌

https://www.stripes.com/travel/scholar-still-honored-for-saving-japanese-cultural-treasures-1.23054#.WOHfs9Lyj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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