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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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혈 행정가 옹정제

bravebird 2017. 4. 24. 00:48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는 2009년에 처음 읽고 손이 덜덜 떨렸던 대작이다. 요즘 들어 계속 읽고 싶길래 어제 결혼식 끝나고 시간 때우러 서점 갔다가 드디어 구입을 했다. 마침 결혼식 식사 자리에서 계속 드립 주고받은 친한 학교 선배가 신입생 시절에 추천해줘서 알게 된 역사가의 저서기도 하다 ㅋㅋㅋ 옹정제 때문에 한순간에 청조사에 빠져버렸고 지금도 중국사 다 재밌지만 그 중 청조사를 제일로 꼽는다 ㅋㅋㅋ 진리임 진짜 ㅋㅋㅋ 준가르에 티베트에 신장에 회족반란에 홍콩에 타이완에 화교에... 그냥 다 청조사 테두리 안에 있음




옹정제는 청대 태평성대를 구가했던 강희제와 건륭제 사이에서 13년 동안 통치했던 황제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이자 건륭제의 아버지다. 강희제가 아주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오랫동안 재위했던 바람에 40 중반이 넘어서 쓴맛 다 보고 완전히 노회한 고단수가 되어 즉위했다. 강희제가 두 번째 아들을 황태자로 세웠다가 내치는 일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형제들이 패거리를 만들어서 서로 음해하고 강희제가 대실망하고 하는 동안에 아주 신중하고 침착한 성격으로 아버지 심기보좌를 잘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황태자가 폐위된 후 옹정제의 친형제였던 열네 번째 황자가 칭하이에서 전공도 세우고 해서 차기 주자로 유력했는데 뜻밖에 옹정제가 후계자로 지목되었기 때문에 뭔가 음모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많다. 본인이 황자 시절에 암투 속에 처신하느라 너무 오랫동안 피곤했고, 끝내 즉위한 후에도 정통성에 대한 갖은 의심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후계자는 직접 지목해서 밀봉한 후 자금성 건청궁의 정대광명 편액 뒤에 숨겨놓고 본인의 임종 시 열어보도록 하였다.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갈아치울 수도 있기 때문에 옹정제의 아들들은 항상 열심히 덕과 능력을 길러야 했다. 그렇게 해서 즉위한 것이 건륭제. 이후 이 태자밀건법은 청조 내내 실시된다. 건륭제가 하도 장수하는 바람에 가경제한테 황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이 되었을 때랑 서태후가 조카 광서제를 황제로 세웠을 때 제외하고. 장자상속하는 한족 왕조랑은 다른 것이 뭔가 청신한 게 있다. 무한경쟁이었을 텐데 내 이야기 아니라고 편히 말하네 ㅋㅋㅋㅋㅋㅋ




옹정제는 시쳇말로 똑부 상사의 전형을 보여주는 철혈 독재군주였다. 지방행정을 포함한 그 거대한 청대 관료기구를 실에 꿰어서 구슬처럼 가지고 놀았던 사기캐릭 같은 황제였다. 아마 과로해서 죽은 것 같다. 나라 돌아가는 일거수 일투족을 직접 알 수 있도록 지방 전역을 포함한 행정기구 곳곳에 이중 삼중으로 밀정을 심어서 교차검증까지 할 수 있도록 했. 관리들이 서간문 형식으로 직접 보고를 올리면 모두 직접 읽고 빨간 색으로 코멘트를 달아 보냈다. 빨간펜 선생님. 미사여구로 입에 발린 소리만 일삼는 간신배 쭉정이는 혼쭐을 내고, 건실한 개혁안을 내놓고 제대로 해내는 관리는 크게 칭찬했으며, 동량지재의 성실한 보고문에는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런 보고문을 하루에 수십 개씩 직접 처리했으니 진정한 워커홀릭이었다. 매일 서너 시간쯤 잤다고 한다.


호방하고 선이 굵은 성격이라 내치뿐만 아니라 무공도 대단했던 아버지 강희제와는 달리 매우 내성적이고 치밀한 성품이었다. 지는 것을 극히 싫어했는데 시원하게 잡아 족치는 식이 아니라 집요하게 증거를 잡아 철저히 옭아매는 식으로 대응했다. 자기의 통치를 비난하는 글이 한인들 사이에서 유포되자 우선 주동자들을 잡아서 심문했다. 무서운 것은, 심문도 문제없이 다 했으니 조져 버리면 간단한데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들에게 평소의 자기 업무 기록을 샅샅이 보여주어 근거없는 비난을 차근차근 논파해 버린다. 결국 놈들이 통절히 반성하며 황제의 근면함에 감화되도록 만들어 버린다. 목숨도 살려 준다. (훗날 건륭제가 즉위 즉시 처단해버림) 대신 선친 강희제를 모욕한 자는 가차없이 목을 날렸다.  처리 과정과 결론을 《대의각미록》이라는 책으로 편찬해서 전국에 유포한다. 장장 5년의 과정이었다. 지독한 것. 


이 치밀한 황제는 한편으로는 매우 청렴결백하고 양심적이었으며 허례허식과 부정부패를 극히 혐오하였다. 당연히 검소함과 성실함을 직접 실천해서 나라를 튼튼히 키웠다. 세제가 개편되고 부정부패가 척결되어 기강이 숙정되었다. 지정은제, 개토귀류, 양렴은제, 부정부패 척결 등등 다 옹정제의 13년 치세 중에 이뤄진 업적이다. 당대 최고의 냉소가조차도 옹정 시대에는 청렴하다는 칭찬이 아무 특별할 게 없었다고 적었다 한다. 그만큼 대공무사와 정직성실이 상식처럼 당연했던 것이다. 이런 천자의 좌우명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천하가 다스려지고 다스려지지 않고는 나 하나의 책임, 

이 한몸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는 일은 하지 않으리라. 


신하들이 올린 주접에는 이런 코멘트를 달아 보낸다. 오오.... 폭풍간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짐은 뜻을 세움에 있어 몸소 근면하게 천하를 이끌어 나가겠다고 결심하였다. 보통 대소 신하가 보내온 상주문은 하나 하나 직접 답장을 쓴다. 


경의 보고는 꽤 길기는 하지만 변명할 필요는 없다. 아무리 길어도 이처럼 유익한 보고라면 읽는 것이 즐거워서 피로를 잊어버린다. 수천 자의 긴 보고문이라도 길다고 해서 끝까지 읽지 않은 적은 한번도 없다. 군신간에 이런 식으로 마음을 쓸 필요는 없다.


짐의 병을 걱정하여 정양하라고 권하는 뜻은 고맙기 그지없다. 그러나 건강은 양생의 문제이지 일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병은 기분에서 생긴다고 한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게을리 하면 기분이 나빠져서 오히려 병세가 악화된다. 다만 자신의 능력을 감안해서 열심히 일해야 한다. 짐은 그런 의미에서 양생하고 있으므로 걱정하지 말라. 


짐에 대하여 성인이니 뭐니 하는 의례적인 말을 늘어놓는 게 제일 싫다. 이런 쓸데없는 편지는 보는 시간이 아깝다. 


굉장히 뜻이 바르고 태도가 훌륭한 황제였다. 다만 너무 똑똑하고 치밀하며 성실하기까지 해서 아주 그냥 사람을 잡았다. 일 못하면 확실히 조지고 구워 삶았다. 유능하고 대공무사의 관념이 철저한 똑부 상사 밑에서 한번쯤 일해보고 싶은데 내 능력이 못 미칠 것 같고, 저만큼 빈틈없는 사람한테 "이런 쓸데없는 편지는 보는 시간이 아깝다" 크리 맞으면 세상 끝난 기분이 들 것 같다... 지금처럼 야금야금 게으름을 구가할 수 있는 게 복인지도 모..르..겠다...


옹정 13년.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탑클래스에 들 만큼 유능하고 청렴한 군주가 전체 관료체제의 빅브라더 역할을 하면서 모든 정치와 행정 사안을 이중삼중으로 교차검증까지 해가며 전부 파악하고 제국을 경영한 시절이었다. 혀를 내두를 정도의 존경스러운 역량이기는 하지만 이건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체제는 아니다. 유능한 한 사람, 특히 최종 보스가 밑에 사람 철저히 조져가며 알아서 다 해버리면 아랫사람들이 클 기회가 없다. 보스가 사라지면 대체할 사람이 없어 유지도 안 된다. 결국 건륭 시기에는 그동안 옹정제 서슬에 눌려 지내던 권세가들이 관대한 정치 하에 점점 기지개를 펴면서 국정운영이 방만해지더니 권신들이 해먹는 체제로 바뀌어 버리고, 건륭 말기부터 청조 멸망의 조짐이 슬슬 나타난다. 옹정연간의 각종 개혁과 국내 경제의 내실 있는 번영은 지극히 비범한 황제의 몸이 13년 동안 으스러져 가면서나 가능했던 기적이었던 것이다. 


중국사 최고의 마스터마인드. 궁극의 사기캐 능력자. 내성적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는 것을 싫어했고 엄정하며 성실했던 철옹성 같은 제왕. 무서운 동시에 존경스럽고 매력적인 동시에 두려운 중국사 캐릭터 중의 캐릭터 옹정제. 정복 군주였던 강희제-건륭제 시기의 장쾌함 아주 좋아하지만, 인물 그 자체를 봤을 때는 그 사이에서 극도의 치밀함과 유능함으로 나라의 반석을 다진 동시에 그 때문에 훗날의 한계를 노정하기도 했던 옹정제가 여전히 가장 흥미롭다. 이런 사람 있으면 그래도 한번쯤은 같이 일해보고 싶다. 13년... 버틸 수 있는지는 논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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