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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러시아 기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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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코스 카잔차키스, 러시아 기행

bravebird 2015. 2. 13. 00:18

 

 

 

발터 벤야민의 모스크바 다이어리 다음으로 읽어본 러시아 기행문. 재미있게 읽었던 『그리스인 조르바』 작가인 카잔차키스가 썼다. 벤야민이 당시 사랑에 빠져 있었던 라트비아 여자 이야기로 가득차 있어 생각보다 별 감흥 없었던 모스크바 다이어리와는 달리, 직접 구입해서 여러 번 더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강하게 드는 책이다.

 

카잔차키스는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난 러시아 사회에 대해서 호기심을 갖고 러시아어를 오랫동안 배운 다음, 1920년대 후반 세 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여행한 후에 이 책을 썼다.

 

작가의 균형 있는 시각이 무엇보다도 인상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의 이상인 유토피아 건설이나 인류사회 진보를 긍정하면서도, 오직 투사나 군인만을 만들기 위해 개인을 말살하고 동심을 억압하는 전체주의적 규격화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공산주의는 서구 물질문명의 한계인 계급 모순을 타파하는 것이 목적인데, 그 실현 수단 역시 서구 물질문명의 산물인 유물론이라는 모순 또한 간파해낸다.  

 

무엇보다도 러시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이 군데군데 힘찬 어조로 쓰여 있어 무척 설렌다. 러시아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의 흥분, 처음 러시아 땅을 딛었을 때의 거의 그리움에 가까운 감격과 호기심이 되살아나게 한다.  

 

"강렬한 호기심과 갈망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내가 가고 있는 북쪽의 그 신비로운 땅은 눈으로 뒤덮인 광대한 평원의 나라이며, 그곳에 사는 수백만 명의 국민 가운데 절반은 아시아인이고, 절반은 유럽인이다. 역설적 특질들, 신비주의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온화한 것과 무자비한 것, 끈기 있는 것과 혁명적인 것 등등을 풍부하게 지닌 그들은 지금 투쟁하고 있다. 대지를 확고하게 딛고 서서 무릎까지 차오른 진흙과 피 속에서, 인류를 위한 새 길을 열기 위해 선구적인 투쟁을 벌이는 중이다." (p.15)

 

"빛과 어둠이 가득한 그 영혼은 온갖 모순적인 것들이 복잡하게 뒤엉킨 채 끓어오르는 발효 작용 속에서, 이성적인 것을 초월하여 위험한 창조를 향해 인간을 밀어붙인다. (...) 러시아인들은 심지어 가장 순수한 충동을 가지고도 범죄를 저지를 수 있으며, 피와 보드카에 절어 있으면서도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러시아인들은 카라마조프가(家)의 늙은 노인과 같다. 그는 부유하고 원시적이며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지니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할 수 없을 만큼 우리를 매료시킨다." (p.18)

 

"대회는 끝났다. 43개국에서 온 1천여 명의 대표들은 일사불란하게 일어서서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 모두는 러시아가 위험에 처한 어머니임을 느끼고 있었다. (...) 이 모든 인종들 사이에서 두드러진 광대뼈와 작은 코, 반은 동양인이고 반은 서양인인 듯 약간 올라간 채 이글거리는 눈에, 예리한 판단력과 광신적인 열정을 지닌─열정적인 목표를 가장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행동에 옮기는 무자비한 현실주의자들─러시아인들이 끼어 있었다." (p.87)

 

"그 친구는 배가 고팠는지 행복하게 수프를 먹으면서, 이 숭고한 육체의 의식에 완전히 몰두했다. 얼마나 힘차고 솔직한 동물인가! 나는 이 건장한 여자에게 감탄했다. 무릎과 무릎을 대고 내 옆에 앉아 있는 그녀는 수백만의 다른 젊은 여성과 다를 바 없이, 모든 경계선을 다 부숴 버리는 열정적인 러시아인의 호방함을 지니고 있었다. 불쌍한 유럽인들은 사랑에 빠졌을 때나 술을 마실 때, 잠시 동안 그럴 수 있을 뿐이다." (p.123)

 

몇 부분 발췌해 두려고 책을 슥 훑어보는데 차마 다 옮길 수 없을 만큼 흥미롭고 알찬 내용이 많다. 러시아 도시들, 민족들, 노동자와 농민, 교도소 군대 학교 결혼 등 각종 사회 제도, 여성의 지위, 전통 종교의 권위 실추와 무신론의 도래, 톨스토예프스키, 스탈린과 트로츠키 등등... 당시 소련 사회 전 영역에 걸쳐있는 방대한 서술인데 재미있게 술술 읽힌다. 다시 읽고 싶을 때는 꼭 구입해서 봐야겠다. 같은 작가의 『토다 라바』 역시 혁명 직후 러시아 사회의 가능성과 혼돈에 대한 내용이라는데, 주말에 바로 빌리러 가야겠다.

 

카잔차키스는 많이 읽어보지는 못한 작가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를 꽤나 좋아했다. 지중해인의 호방함을 느껴보고 싶어서 언젠가 꼭 그리스에 가보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었다. 카잔차키스가 러시아에도 관심이 많았다니 더 반갑네! 이번 기회에 기행문 시리즈부터 해서 전집 차근차근 읽어 봐야겠다. 5년쯤 전에 사놓고 끝까지 읽지는 않은 카잔차키스 자서전도 집에 있는데, 오랜만에 꺼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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