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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필요없다 - 옛날에 친 밑줄들 본문

독서

오빠는 필요없다 - 옛날에 친 밑줄들

bravebird 2019.08.05 01:17
내가 페미니즘에 매우 실망하고 거리를 두게 되면서 집에 여성주의 관련 책이 별로 안 남아있는데 잘 읽은 몇 권은 남겨두었다. 그 중 '오빠는 필요없다'라는 책이 있는데 2011년에 중국 가기 전에 재밌게 읽은 기억이 난다. '진보의 가부장제에 도전한 여자들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책이다.

나는 진보든 보수든 남자든 여자든 관계없이, 자기 객관화가 안 되고 성찰을 할 줄 몰라서 자기 입장만 우기는 꼴통 꼰대가 싫다. 처음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남자 꼰대가 싫어서였고 최근 페미니즘에 환멸을 느낀 것은 페미니스트 꼰대가 싫어서인데, 이 책은 다양한 꼰대 중에서도 운동권 꼰대를 까는 책이다. 진보 진영의 위선적이고 독선적인 행태에 환멸을 느껴본 사람들이라면 페미니즘을 평소 싫어했더라도 의외로 재밌게 읽을 것이다. 정치 성향을 떠나서, 페미니즘에 대한 호오를 떠나서, 이 책 흥미롭고 잘 읽혀서 추천한다.

그때 줄친 부분들 지금 다시 봐도 끄덕여진다. 특히 글쓰는 행위라든가, 절대 진리란 과연 존재하는가에 대한 평소 생각(하이젠베르크 자서전 읽고 쓴 글에서 다뤘음)이 이 책의 영향을 받은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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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방법론에서는 글 쓰는 사람을 익명의 초월적 위치에 두는 것을 강력하게 문제삼으면서, 자신의 위치와 글 쓰는 맥락을 드러내는 것이 더 '객관적'이라고 본다. 연구자 또한 비가시적이고 익명적인 권위의 목소리가 아니라, '연구 대상'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이고 특정한 욕구와 이해관계가 있는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p.3)

직선이 아닌 것을 직선처럼 묘사했거나, 단계가 아닌데 단계처럼 쓰인 곳들이 있어 걱정스럽다. 열심히 썼지만 평면 위에 펼치기에는 다른 차원이 필요한 부분이 너무 많았다. 자기 위치를 상대화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포괄하고 싶었고, 그러면서도 또 그것 또한 '부분적 진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 했다. 내가 쓸 수 있는 것 이상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닌지 두려움과 회의에 빠질 때가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고 싶어질 때마다 스스로 용기를 북돋기 위해 생각한 것은, 어차피 모든 사람을 위한 완벽한 지도는 없다는 것이다. 그냥 이 책에 쓴 나를 포함한 어떤 여성들의 이야기가, 독자들이 여성(주의자)으로서 각자의 지도를 그려가는 데 하나의 참조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p.8)

여성주의 인식론은 '과학적 과정'을 엄격히 준수하면 누구나 동일한 '객관적 지식'에 도달한다는 기존의 실증주의적 가정을 의문시하면서, '어떤 방법을 통해' 알 수 있느냐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누구 위치에서' 본 것인가 그리고 '왜 하필 그것을 알고자 하는가'라는 것이라는 새로운 논점을 제기한다. 모든 것을 한 번에 꿰뚫어볼 수 있는 '신의 위치'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식자로서 자신을 부분화하고 상대화하지 못한 채 생산된 지식은 '객관적'이기 어렵다. (p.154)

진보는 "진보하고자 하는 에토스 그 자체"이며 어떤 하나의 주제나 이슈로 고정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해줬다. 그런 에토스를 상실하고 특정한 문제나 집단을 중심으로 고정된 '진보'는 이내 '진부'해질 수밖에 없다. 진보는 다전선적이며, 역사적, 맥락적 상황에 따라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누가, 어떤 관점에서 정의하는, 무엇에 대한 진보인가를 항상 새롭게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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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외에도 젠더 이슈 관련해서 재밌게 읽었던 책들 몇 권 있는데

1. 조주은 - 현대 가족 이야기
이건 예전에 현대차그룹에서 일을 하면서 '여자들은 시집가면 땡이지 공부시켜 뭐함' 내지는 '여자는 들어갈 데 들어가고 나올 데 나와야 된다' 운운하는 현대차그룹 남자 꼰대들의 행태에 치를 떨며 찾아 읽었는데 명저였음. 이 분 부부가 노동운동을 했는데 남편은 울산에서 현대차 생산직으로 취직하고 저자는 전업주부로 살면서 젠더 연구를 한 케이스. 현대차 생산직 가정의 성별 분업, 가족임금 모델 같은 것에 대해서 실감나게 잘 다룬 인류학 현지조사 보고서 같은 느낌. 진짜 재밌게 읽음.

2. 권인숙 - 대한민국은 군대다
마침 당시 권인숙 선생님이 학교에 강연을 오셔서 감명 깊게 읽었다고 소감을 전했던 책이라 기억에 남는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피해자였던 저자가 상처와 분노에 매몰되지 않고 잘 딛고 일어서서 대한민국이 얼마나 군사화된 사회인지 차분하고 담담한 연구서를 쓴 게 존경스러웠음.

3. 김두식 - 평화의 얼굴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한 헌법학자의 책. 입대를 거부했다고 전과자가 되는 응징을 이미 받았는데도 군필 아니라고 욕을 먹는 병역거부자들이 안타까워서.. 징병제에 과연 대안은 없나 궁금해서 읽어봄. 읽은 지 너무 오래되었지만 당시 감상은 법학자로서 면밀한 개념 정의가 돋보였고, 메노나이트의 평화주의라든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 등 배경 역사 이야기를 조리있게 잘 써놔서 감명받았음.

애초에 꼰대문화, 군사주의, 그리고 징병제처럼 강제로 끌려가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크고, 그건 지금도 바뀌지 않았으므로 저 책들은 지금 다시 읽어도 감상이 많이 다를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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