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발제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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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올바름에 대하여》 발제

bravebird 2019. 9. 30. 01:53

친구들아 만나서 얘기해보자. 편히 썼다.

 

1. 네 명의 논객 중 누구 의견에 가장 가까운가? 

나는 스티븐 프라이 쪽에 가장 가까운 것 같다. 프라이는 온건 좌파, 말랑말랑한 자유주의자, 의심하는 반체제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또 동성 결혼한 게이이며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PC의 스타일(설교, 독선, 아집)은 비판하며 그 실질적인 효과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나는 사회적 이슈에 관해서는 리버럴한 관점을 일관되게 유지해온 편이지만, PC 방식에 대해서는 점점 의문이다. 아직도 인종 차별이나 성별 간 불평등, 섹슈얼리티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데는 동의하고 이런 것들이 점차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PC는 단어 싸움 같다. 단어를 바꾼다고 해서 실제 존재하는 사회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2. 정치적 올바름이 실제로 사회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난 의문. '키가 작은'이라는 표현을 'vertically challenged'라고 바꾼다고 해서 키작은 사람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 오히려 작은 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역설적으로 더더욱 드러내는 것 아닌지. 

 

흑인과 백인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진 속 사람들을 묘사해보라는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실험 대상자들은 '흑인'과 '백인'이라는 특성을 감히 언급 못했다고 한다. (스티븐 핑커 '언어본능'에서 읽은 것 같은데 잘 기억이 안남) 이 경우 누가 봐도 가장 두드러지는 특성이 바로 피부색이며 그걸 언급한다고 해서 특별히 차별 대우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colorblind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 때문에 피부색은 거론조차 못 하는 것이다.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표현의 자유만 과도하게 침해될 뿐이지 인종 차별이라는 현실이 실제 교정되는 것도 아니다.  

 

3. 핑크 자본주의(무지개 자본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요즘 기업들이 회사 로고를 무지개 색깔로 바꾸거나 LGBTQ 옹호 메시지를 회사 홍보나 자사 제품에 담는 경우가 많다. 나는 LGBT 권리는 옹호하지만 이게 마케팅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에 대해서는 조금 의문이긴 하다. 이에 대해서는 LGBT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오지 않고 비주류 저항 운동으로 남아있어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하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반론 또한 타당하다. 소수/비주류가 무조건적인 정의는 아니다. 또 어떤 집단이든 결국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힘을 얻어 주류가 되려고 할 것이다. 

 

핑크 자본주의를 통해 LGBT 관련 논의가 메인스트림으로 올라온 것을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는지, 혹은 보여주기식의 상업주의로 보아야 하는지 의견을 나눠보자. 

 

배경 스토리 자체가 게이 컨셉으로 갑자기 바뀌어서 논란이 되었던 리그 오브 레전드 챔피언 바루스
오버워치 레즈비언 캐릭터 트레이서
리그 오브 레전드 레즈비언 캐릭터 니코
상남자 같은 여성 돌격대 챔피언, 오버워치 자리야

애플, 구글..글로벌 대기업은 왜 '무지개'를 응원하는가
글로벌 브랜드의 무지개색 변신… '성소수자' 소비시장 큰손으로

 

4. 스웨덴 국립 역사박물관과 같은 역사 전시 방식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예전에 스웨덴 국립 역사박물관에 갔다가 쓴 글이 있는데 당시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를 쭉 다루는 역사박물관인데 모든 전시 섹션의 군데군데에 성소수자의 코멘트가 달려있었다. 가족 제도, 이성애 중심주의, 남녀 성별 분업 등등에 대해서 방문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박물관의 구성 자체도 새로웠다. 이런 진보적인(내지는 교정적인) 사고방식이 스웨덴에선 메인스트림 그 자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었고, 오늘날 스웨덴의 특징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라서 꼭 한번 가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나라 국립박물관과는 달리 저런 화두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고 막 관객한테 질문을 던지니까 신선하고 흥미로웠지만 좀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들었다. 예컨대 바이킹 시대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성 역할에 관한 비판적 코멘트, 그러니까 상당히 현대적인 비평을 꼭 곁들여야 할까? 당시의 상식과 현대의 상식은 다를 수밖에 없는데. 

 

스웨덴 국립 역사박물관 같은 전시는 전형적인 소셜 엔지니어링 사례 아닐까?

젠더나 섹슈얼리티 이슈에 대해서 정부가 얼마나 개입해야 적당할까?

 

5. PC 운동은 위선인가, 소수자를 위한 새로운 언어인가? (강남좌파, 패션좌파, 마오주의자 논란)

예전에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라는 책에서 마오주의에 대한 글을 재밌게 읽었어서 소개하고 싶다. 서구 탈식민주의 이론가들이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고 제3세계 타자를 옹호하는 글을 계속 쓰지만, 결코 제3세계 사람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으며 오히려 제3세계의 박탈과 결핍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할수록 권력과 지위와 재산을 얻을 뿐이라고 비판하는 내용이다. 자신들의 학문적 권력 자체가 서구 세계의 물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는 건데 그걸 애써 부정하면서 제3세계를 이상화한다는 것이다. 이걸 읽으면서 강남좌파에 대한 비판이 떠올랐고, 요즘 핫이슈인 조국의 그간 행보(따뜻한 개천 이야기라든가)도 이 마오주의랑 밀접하다. 

 

어떻게 생각함? PC 운동은 차별이나 소외와는 오히려 정반대편에 있는 주류 세력의 지적 유희이자 패션일까? 혹은 소수자들이 억압적인 기존 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을까?

 

 

※ 마오주의에 대한 내용은 아래 발췌문 참조. 

 

"전형적인 마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싫증난 문화비평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것과는 반대되는 사회질서를 원하는 문화비평가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이다. 마오주의자가 원하는 것은 항상 타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결과 자신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찬미가 나타난다. 찬미되는 것은 종종 타자의 불행ㅡ가난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ㅡ이므로, 마오주의자의 전략은 주로 자신의 수사를 가능케 해주는 물질적 힘을 수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오리엔탈리즘이 반드시 백인의 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주의자 역시 반드시 인종적으로 '백인'은 아니다. '백인의 죄'라는 말은 계속해서 권력과 결여를 서로 대치시키는 담론유형을 가리키는데, 그 담론의 화자는 제인 에어처럼 권력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무력한 것과 동일시한다. 이는 특권층 출신조차 특권의 '결여'라는 입장에서, 결여에 대해, 결여로서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연유를 설명해준다. 마오주의자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원을 끌어내면서도 자신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산적 순환이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항상 자기담론의 물질적 기반을 은폐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순수하게 탄생한 것처럼 말한다. (pp.31-32)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단지 자신의 보물이 녹슬어버리는 것을 한탄하는 '제1세계'의 오리엔탈리스트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양과 비서양을 막론하고 특권적 배경을 가진 연구자와 학생들도 문제인데, 이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의 사회적 출신에 어울리는 엘리트주의에 따라 행동하지만(예컨대 혼인을 통해 권력을 얻고, 명성을 추구하고, 동료 학자를 경멸에 찬 오만함으로 대하는 등), 그럼에도 '서발턴 구제'에 헌신할 것을 공언한다. 나는 그들이 특권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야 한다거나, 그들이 부자와 결혼하고 명성을 추구하고 심지어 오만해져서는 안된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의 논점은 그들이 타인의 무력함 속에서 자신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발견하려 한다는 것이며, 자기 발언의 내용과 형식 사이의 부조화 속에서 자신이 폭력과 공모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이다. 마오주의자의 후예들은 19세기 영국의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동양은 하나의 경력이다"라는 발언의 폭력성을 재빨리 지적할지도 모르지만, 정작 자신들이 '동양'을 경력 쌓기의 도구로 삼으면서 생기는 폭력성은 외면하고 있다. (p.32)

 

우리는 지식인들의 싸움이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싸움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체제적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적과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지배의 중심부 또는 주변부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짓밟힌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도 분명 아니다. 따라서 학계의 지식인이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었다'(또는 피억압자와의 연대 속에서 자신이 희생당했다)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반체제적' 담론에 의해 축적되는 권력·부·특권이며, 자신의 말이 공언한 내용과 그런 말로부터 자신이 얻는 신분상승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푸코가 지식인은 권력의 대상과 도구가 되는 것에 저항하여 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 결여로서의 타자에 대해 줄기차게 말하지만 봉급과 사례금이 계속 올라가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왜 믿어야만 하는가? 반체제적 담론의 의도가 기성체제에 의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대체하고 부인하는 것일진대, 그 담론 자체가 적정한 것으로 전화되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p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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