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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고백하는 사람이 갑

bravebird 2019. 11. 21. 00:51

두 사람 사이에 갈등관계가 존재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갈등관계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풀기 위해 먼저 움직이는 것이다. 왜 먼저 움직이는 것이 중요할까? 먼저 움직이면 우선 상대방에게 무어라고 말할지 준비할 수 있고, 상대방의 예상되는 반응에 대하여 다시 어떻게 대응하면 좋을지 그에 상응하는 준비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화의 이니셔티브를 쥘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협상력이나 힘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p.168)

 

요즘 게임이론에 재미를 느끼고 있는데, 《게임이론의 관점에서 본 협상과 전략》이라는 책을 읽다가 평소 생각과 정말 비슷한 내용이 있어 가져왔다. 

나는 상식과는 다르게, 고백을 받는 쪽이 아니라 하는 쪽이 갑이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계약의 과정에 비유하자면, 고백을 하는 쪽이 받는 쪽에게 계약서를 써서 내미는 쪽이다. 그러면 받는 쪽은 보통 계약서를 처음부터 다시 갈아 엎어쓰지는 않는다.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숙제하듯이 그 계약서를 조목조목 읽고 또 읽으면서 검토하게 된다. 어느 새 '쟤랑 사귈까 말까?'라는 틀 안에서 생각하게 된다. 결국 고백하는 쪽이 판을 다 짜서 내밀면 고백을 받는 쪽은 yes든 no든 그 판 안에서 생각한 결과를 답변으로 내놓게 된다. 

즉 고백한 쪽은 판을 자기가 짰고, 행동도 자기가 선택했고, 그 결과도 스스로 받아들이는 용자다. 게다가 사람은 보통 자기 좋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한 번이라도 호기심을 갖게 된다. 고백이라는 행동은 자기 자신을 낱낱이 드러내어 취약하게 만들지만,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고백이 실패한 후 모든 관심을 거뒀더니 오히려 고백 받았던 쪽이 아쉬워져서 연락을 해오는 일은 아주 흔하다.

고백이라는 궁극기를 사용하면 쿨타임이 돌기 시작하고 나는 그 동안은 궁극기를 쓸 수 없으니 절대 을이 되는 것만 같지만, 사실 상대방도 그 궁극기를 맞고 비실비실해져서 뭔가 액션을 취할 수밖에 없도록 된다. 강제 이니시에이팅에 걸린 것이다. 실생활에서 단판제 게임은 잘 없다. 대인관계는 보통 다전제 게임이다. 그럼 내 이니시에이팅으로 인해 게임이 개시될 것이고 언젠가는 내 턴이 다시 돌아온다. 그때 고백하는 쪽이 영화 대부 대사처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해버린다면(I'll make you an offer you can't refuse.) 그러니까 궁극기를 상대방 심장에 제대로 꽂아버린다면 그야말로 절대 갑이 된다. 

 

 

심지어 거절을 당한다고 해도 여전히 고백한 쪽이 갑이다. 세상은 넓기 때문에 깨끗이 단념하고 또 다른 사람을 찾으면 된다. 한번 고백을 해본 사람은 판을 짜고 액션을 취해서 결과를 받아들이는 경험을 해본 용자이기 때문에 더 나은 시행을 반복하게 된다. 고백을 받기만 하는 쪽은 자길 좋다는 사람 중에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람을 만나게 되겠지만, 고백을 계속하는 쪽은 언젠가는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과 사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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