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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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의식의 흐름 메모

bravebird 2020. 2. 20. 02:46

1. 나는 여행할 때를 제외하면 일기를 쓰지 않는다. 여행 중 일기를 쓸 때면 귀찮아서 악필이다. 블로그에 여행기를 쓰는 것도 귀찮아 한다. 이미 지난 일을 자세히 묘사하는 것보다는 앞날을 상상하고 준비하는 것이 훨씬 즐겁다. 둘은 완전히 다른 작업이다. 이미 지나간 것을 너무 성실하고 세세하게 기록하는 것이 굉장히 피로하고 좀 무의미하다는 생각을 한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지만 지난 일에 대한 성찰과 응용은 또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일기를 쓰기보단 산책하거나 대화하면서 하는 걸 선호하며, '이번엔 이랬으니까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겠다'처럼 과거가 아닌 미래에 초점을 둔다.

 

2. 물론 여행기를 안 쓰면 휘발되는 기억이 있어 아쉽긴 하지만 잊힐 것은 잊히고 남을 것은 남는 것이 원래 자연스럽다. 아마 살아남은 기억 역시 내 상황이 변화함에 따라서 계속 카멜레온처럼 모습을 바꿔갈 것이다. 이게 인간 한계다. 사람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온전하게 인식하거나 표현할 수 없다. 모든 현상은 서있는 자리에 따라 달라지는 각자의 해석을 거치게 된다. 진실은 홀로그램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것 같다. 난 그 홀로그램의 모든 면모를 한 눈에 볼 줄은 모른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대신 그 홀로그램을 최대한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려는 노력은 가능하다.

 

3. 이곳에서 여러 번 이야기했지만 글쓰기는 꽤 위험하다. 현실은 글보다 훨씬 복잡 다단하고 디테일이 풍부하며 비논리적이고 비선형적이다. 반면 좋은 글은 단순 명료하고 논리적이며 일관적이다. 따라서 좋은 글일수록 실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있을 수 있다. 지구를 평면에 펴서 그리면 반드시 오차가 발생하고 만다. 

 

4. 결혼할 사람은 처음 보자마자 감이 온다는 사람들이 많던데 난 정말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한다. 저것만한 결과론 내지 사후 합리화, 혹은 그 반대인 wishful thinking은 또 없을 것이다. 아마 일기나 여행기나 기억이라는 것 자체가 많은 부분 이런 식일 거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런 것에 시간을 너무 소비하지 않겠다. 일기를 쓰기보다는 같은 일을 함께 경험했지만 관점이 좀 다른 사람과 열띤 대화를 하는 것이 더 유익한 경험이다. 

 

5. 돈 쓴 내역을 기록하는 것도 별로 의미 없다고 본다. 핸드폰 가계부를 사용하고는 있는데, 나의 경우 과거의 지출을 트래킹한 기록이 미래의 지출에 거의 영향을 주지 못한다. 내 지출에 가장 큰 변동을 발생시키는 것은 경조사나 갑작스러운 병원비처럼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사안이다. 그런 일이 아니라면 지출 규모에 큰 변화가 없다. 별 변동도 없는 자질구레한 디테일을 세세히 기록하고 통제하느니, 적당한 변동범위를 허용해주고 그냥 편안히 돈을 쓰는 것이 낫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히 지출하는 태세만 고수한다면 지출 기록을 세세히 남길 필요가 없다. 

 

6. 작년에 발주 업무를 할 때 최상위 결재자는 내년 수요를 예측하고 발주해야 한다면서 항상 전년 판매 추세를 근거로 요구했다. 난 심히 의문이었다. 과연 작년 추세가 내년에도 유효할까? 비즈니스는 측정할 수 있는 성과가 생명이기에 모든 걸 예측 가능하고 계량화 가능하도록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과거 추세가 미래에도 반복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런 식으로 수요 예측을 하는 것은 너무 나이브하고, 오직 결재 받기만을 위한 쓸데없는 요식행위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 수요 예측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냥 아예 예측과 계획을 포기하고 그때그때 대처해야 하나? 그건 또 그것 나름대로 나이브하지 않은가? 계획하는 태도가 좋을까 임기응변하는 태도가 좋을까? 계획과 임기응변 사이의 균형점은 어디일까? 계획하는 것이 나은 영역은 무엇이고, 임기응변이 최선의 대처인 분야는 무엇일까? 

 

7. 올해 주식을 시작했다. PBR PER ROE도 보고 사업개요도 읽어보지만, 보통은 차트 모양이 꾸준한 우상향이며 매출과 영업이익이 꾸준히 증가해온 종목에 투자한다. 그 패턴이 미래에도 반복될 거라고 무의식 중에 믿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우상향 추세가 앞으로도 계속될 거라는 보장이 어디 있나? 과거는 과거일 뿐 아니야? 주가의 미래는 어떻게 예측해야 하는가? 무엇에 근거해서 투자 결정을 내려야 하지?

 

8. 나는 유사한 여러 가지 현상 간에 공통점과 차이점을 뽑아내는 식의 사고 패턴을 가지고 있다. 디테일로부터 아이디어를 추출해내고 나면 디테일은 곧 잊어버린다. 그래서 내 생각이나 글은 다소 비약적인 것 같다. 이런 사고 패턴상 실제적이고 묘사적인 글쓰기보단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글쓰기를 하게 되고 그건 약간 독선적이라고 생각하며 그래서 글에 매몰되지 않으려고 한다. 그나저나 내겐 이 글의 1번부터 마지막까지가 모두 너무나도 밀접하게 관련 있는 것들인데 왜 그런지 치밀하게 설명은 못하겠다. 남들한테도 과연 전달이 잘 될까.

 

9. 페터 한트케의 <소망 없는 불행>이 내 이런 생각들과 꽤 접점이 많은 책이었다. 도대체 왜 유사한가 하는 디테일을 묘사하는 것은 너무 귀찮기 때문에 생략한다. 자살한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려고 하는, 하지만 자기 관점에서 재단해버리지는 않으려는 작가의 고뇌어린 줄타기가 엿보이는 책이었다.

 

10. 뭐 이런 생각들을 평소 해왔는데 역시나 정리가 어렵다. 요즘은 나심 탈렙의 <블랙 스완>을 읽고 있고, 이 책은 이 글에서 내가 구구절절 늘어놓은 복잡한 이야기와 깊이 연관돼 있어서 재밌다. 조금 인용해 본다. 언젠가는 이 거친 의식의 흐름을 정리해서 잘 다듬어진 서평을 쓰고 싶다. (음, 여전히 지구를 평면에 그리고 싶은가 보군.)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고, 요약하기를 좋아하고, 단순화하기를 좋아한다. 한마디로 인간은 환원시키기를 좋아한다. 우리가 이 장에서 검토하게 될 인간 본성의 첫 번째 문제점─앞의 이야기가 잘 보여준 것─을 나는 이야기 짓기의 오류라고 부른다(사실 오류가 아니라 사기에 가까운 것이지만, 점잖게 오류라 부르기로 하자). 이 오류는 인간의 확대해석, 날것의 진실보다 압축된 이야기를 편애하는 경향과 연관이 있다. 이 오류는 세계에 대한 표상을 심하게 왜곡시키는데, 희귀한 사건과 관련해서 특히 심각해진다. (p.132)

 

이야기 짓기의 오류는 연쇄적 사실들을 억지 설명이나 논리적 연결고리, 즉 화살표에서 벗어나서 바라보지 못하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리킨다. 설명은 사실들을 엮는 작업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엇보다 기억하기가 용이해지며, 납득하기가 용이해진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해했다는 느낌이 증폭되는 그 순간, 이러한 습성은 과녁을 빗나간다. (p.132)

 

우리는 영장류 가운데 인간 종의 성원으로 규칙에 대한 허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주어진 문제의 차원을 축소시켜 그것들을 우리 머릿속에 집어넣기 위한 것이다. 아니, 안타깝지만 우겨 넣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정보가 무작위적일수록 차원이 더 커지며, 따라서 요약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거꾸로, 요약할수록 더 질서 정연해지고 무작위성은 감소한다. 말하자면, 단순화를 강요하는 바로 그 조건이 세계를 실제보다 덜 무작위적인 것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것이다.

  검은 백조는 단순화 작업에서 버려지는 부분이다. 

  예술적 작업과 과학적 작업도 차원을 줄이고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 욕구의 산물이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 수조 개의 세부요소로 가득 찬 세계를 생각해 보라. 그 세계를 기술해 보라. 아마 여러분은 한 가닥의 실로 세계를 직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소설, 이야기, 신화, 민담 등은 모두 똑같은 구실을 한다. 그것들은 세계의 복잡성으로부터 우리를 구출해 주며, 우리에게 세계의 무작위성으로부터의 피난처를 제공해 준다. 신화는 인간 지각의 무질서와 지각된 '인간 경험의 카오스'에 질서를 부여한다. (p.141)

 

무작위성이 지배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후 결과를 기준으로 과거의 행동을 평가하는 소모적인 굴레에 얽매이기 쉽다. 일기를 쓰는 일 따위는 이런 분야에서 최소한의 출발점이 된다. (p.147)

 

11. 나는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사는데 인생 전체는 되는 대로다. 하루하루 스케일의 자그마한 일들은 계획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가 있는데, 인생 전체를 좌우하는 중대 사안들은 그런 식의 처리가 불가능하다. 큰 기회나 전환점은 우연과 불확실성의 소관이다. 그건 계획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오직 대처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서퍼라도 파도 자체를 계획할 수는 없다. 이전에 있었던 파도를 자세히 기록해둔다고 해서 다음에 올 파도가 예측 가능한 것도 아니다. 언젠가는 파도가 있을 만한 곳에 가있는 것, 파도가 왔을 때 어떻게 탈 것인지 매일 시뮬레이션 하고 연습해 두는 것, 그리고 파도가 왔을 때 서핑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는 것 정도가 서퍼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후에는 닥친 파도에 그때그때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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