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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심 탈렙

bravebird 2020. 3. 9. 03:11

최근 <블랙 스완>, <행운에 속지 마라>를 너무 재미있게 다 읽었습니다. 할 얘기가 너무 많은데 다 표현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적당한 제목도 떠오르지가 않네요. 글을 몇 번 끊어 올리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선 바로 이전글 <의식의 흐름 메모>도 나심 탈렙과 관련된 글이었습니다. 

 

일단 어쩌다가 이 아저씨 책을 접하게 되었는지부터가 긴 이야기입니다. 저는 주말에 아주 밤을 샐 지경으로 게임을 하는 날이 많습니다. 작년 365일 중 게임에 쓴 시간이 22일이 넘습니다. 집계에 안 잡힌 것도 있으니까 그것보다 훨씬 많이 했을 겁니다. 그러고 났더니 이런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 게임은 왜 이렇게 재밌을까? 

- 게임이나 일이나 공부나 다 배우고 익히느라 고생해야 하는 건데 왜 게임은 유난히 재밌을까?

- 사람들은 왜 내기와 승부를 좋아할까?

- 게임과 전쟁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 도박의 동기는 뭘까? 돈 때문일까, 기술을 발휘하고 싶어서일까, 도전과 참여 그 자체를 위해서일까, 내가 이만큼이나 걸 수 있으며 잃더라도 개의치 않는 강한 성격임을 보이고 싶어서일까, 탕진의 재미를 위해서일까, 운을 시험하기(불확실성을 해소하기) 위해서일까? 

- 도박과 투자와 창업과 번지 점프와 인도 여행의 공통점과 차이점은 뭘까?

- 위험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까?

- 운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호기심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직접 경험은 어려운 부분이 많으니까 아주 그냥 더 미쳐가지고 비디오 게임, 승부 행동의 사회학, 도박의 역사, 도파민, 호모 루덴스, 게임이론, 행동경제학, 리스크, 협상론, 밀리터리, 마키아벨리, 니체, 도스토예프스키... 몇 개월간 조금이라도 관련 있다 싶은 책이면 닥치는 대로 읽어댔고 최대한 주변에 묻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내 크고 작은 선택에 적용해보기도 하고 ㅎㅎ 아직 한창 진행 중입니다. 그러다 보니 불확실성과 운에 대한 나심 탈렙의 책들을 접하게 된 거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운과 불확실성에 대한 제 평소 생각과 너무 비슷한 얘길 하고 있어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저는 백석의 유명한 시에 나오듯 뭔가 커다란 것이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게 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도무지 계획과 의지대로 착착 되어가지가 않죠. 내 삶에 가장 격변을 가져다준 일들은 언제나 설계와 예측 밖의 일들이었습니다. 

 

뭔가 성취했을 때도 온전히 나만의 성과라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습니다. 대학을 갔을 때도 (1) 공부에만 집중해도 될 정도의 평범한 집안 분위기, (2) 수능 당일 좋았던 컨디션, (3) 성적 받기 수월했고 덕분에 선생님들께 케어받을 수 있었던 고등학교에 다닌 것, (4) 적당하게 타고난 학구열과 승부욕 등등 여러 가지 운이 동시에 작용했다는 생각을 항상 합니다.  

 

회사에 다니면서는 본인 성과를 주장해야 할 때마다 항상 불편합니다. KPI를 달성했다든가, 방문자수와 매출을 얼만큼 달성했다든가 하는 업적이 온전한 나만의 성취라는 생각이 든 적이 사실 한 번도 없습니다. 회사는 이미 거래선을 다 확보해 놓았고 사업은 궤도에 올라 있으며, 이미 다 짜여 있는 분업 체계 속에서 많은 직원들에게 잘게 조각내준 일을 제가 한 거죠. 그 속에서 나 역시 노력하긴 했어도 결국 최종 결과는 또 상당 부분 운의 소관이지요. 왜냐고요? 실적이 잘 나오면 팀 자체가 원래 캐시카우 사업을 맡고 있다든가 회사나 산업 자체가 잘나가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실적이 안 나올 때는 오히려 일은 더 열심히 했지만 경기 자체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나심 탈렙은 이렇게 운이 좋아 얻은 성과를 자기 능력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물론 운이 모든 것을 다 하지는 않죠. 아무리 호경기라고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일을 제대로 열심히 해내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사는 운과 우연이 많은 것을 좌우하기 때문에 섣불리 앞날을 예측하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가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하며, 행운 앞에서든 불운 앞에서든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며 품위를 지키자는 것이 나심 탈렙의 결론입니다. 

 

영웅이 영웅이 된 것은 전쟁의 승패 때문이 아니라, 행동이 영웅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서사시의 영웅들은 결과가 아니라 행동으로 평가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가 아무리 정교하게 선택하고, 운을 잘 지배할 수 있다고 자만해도 결국 최후는 운이 결정할 것이다.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해결책은 품위뿐이다. 품위란 환경에 직접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계획된 행동을 실행한다는 뜻이다. 그 행동은 최선이 아닐 수도 있지만, 분명히 최선의 기분을 느낄 수 있는 행동이다. 억압 속에서 품위를 유지하라. 이는 아무리 보상이 크더라도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태도다. 또는 체면을 지키려고 결투를 하는 것이다.   (<행운에 속지 마라> 중에서)

 

최종 결과는 운이 결정합니다. 하지만 과정 중의 태도와 행동은 내가 정합니다. 그 태도와 행동, 그리고 그걸로 얻는 경험은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소유입니다. 남의 회사 직원으로 일하는 한, 매출이나 방문자수가 나의 고유 업적이라는 생각은 영원히 안 들 것 같습니다. 이 자기소외감이야말로 제가 하루빨리 임금노동에서 해방되려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그렇지만 일을 할 때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어떤 태세로 하기로 했는가, 그래서 뭘 실천하고 뭘 경험했는가 하는 것만은 나한테 고스란히 남겠죠. 그러니까 이왕 하는 일 적극적으로 좀더 잘해보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는 이 비즈니스 월드에서 하산할 작정이지만, 다른 봉우리를 오를 때 이 체험을 어떤 식으로든 응용하게 될 테니까요.

 

사실 이 비슷한 내용을 예전에도 쓴 적이 있습니다. 정말 아끼는 책인데요, 캐나다 우주비행사 크리스 해드필드가 쓴 <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를 읽고 쓴 이에요. 오랜만에 다시 한번 보고 왔는데 요지가 아주 비슷합니다. 나심 탈렙은 트레이더였는데, 우주비행사나 트레이더나 모두 위험과 불확실성을 다루는 직업이라서 그런가 봐요. 해드필드는 얘기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떤 것이든 준비해 두라는 것. 사소한 것에 진땀빼며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 또 내가 제어 못하는 변수가 수두룩한 우주비행이지만 단 한 가지 제어할 수 있는 것은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의 내 자세라고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복잡한 세상이지만, 어떻게 할 수 있는 확실한 것, 온전히 내게 속하는 것이 그래도 남아 있어서 다행이지 않습니까. ㅎㅎ

 

이런, 곧 하릴없이 월요일 아침을 맞아야 하는군요...ㅋㅋㅋ 위에서 백석을 언급했으니 수미상관(?)을 위해 굳고 정한 갈매나무마냥 한 주를 맞겠다고 다짐.........은 커녕 마냥 놀고만 싶다 젠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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