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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책 쓰기를 원하는가?

bravebird 2020. 4. 12. 20:15

예전에 인생 목표 중에 책 쓰기를 꼽은 적이 있다. 지금은 그에 대해서 의문이다. 

 

관심 분야 몇 가지에서 내 나름대로 경지에 이르고 싶어서 책을 쓰겠단 생각을 했었다. 

 

근데 책쓰기를 목표로 삼으면 재미로 하던 것마저 굳이 과제로 만드는 것 같다. 

 

어떤 워커홀릭 한 분이 생각난다. 

 

이 분은 평일에도 새벽까지 일하면서 주말에 하는 취미생활로도 돈 벌 방법을 찾았다. 

 

다른 사람에게 취미를 물어보면서도 그걸 사업으로 만들어보란 말을 꼭 덧붙였다.

 

진취성은 높이 사지만, 취미조차 프로젝트로 만드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를 준다. 

 

아무래도 진정한 재미는 아무 짝에도 쓰잘데기 없음, 탕진, 낭비, 비합리성, 놈팡이 짓에 있는 것 같다. 

 

취미를 습관, 루틴, 과업, 목표로 삼는 것도 모자라서 돈벌이 수단으로까지 만들자니 밥맛이 떨어진다. 

 

따라서 책을 쓰겠다는 목표는 관두련다. 

 

사실 내게 글쓰기, 특히 과제로 부과된 글쓰기는 재미가 없고 노동에 가깝다. 

 

책 쓰기를 통해서 따라오는 부수적 효과(이름 공개, 까발려지는 느낌 등)들도 다 번거롭다. 

 

책을 쓰자면 구성상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이걸 굳이 남 앞에서 말할 이유는 못 느낀다. 

 

생업은 당연 열심히 해야만 한다. 열심히 해야만 해서 열심히 하는 일은 그런 것들로 이미 충분하다. 

 

취미생활만큼은 그냥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은 때 하고 싶은 만큼만 할 것이다.

 

그날 있었던 일을 그날 써야만 하는 일기, 그날 본 것을 그날 써야만 하는 여행기를 싫어하는 이유도 모두 같다.

 

재미로 하는 것이기에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굳이 일기를 쓰지 않을 것이며 가계부에 얽매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생각과 느낌이 시간에 따라 자유롭게 변해가도록 놓아두다가, 

 

어쩌다 정 글이 쓰고 싶은 순간이 있으면 그때 원하는 만큼만 할 것이다.

 

책 쓰는 것을 애초부터 목표로 하거나, 여행 등 순전히 재미로 하는 취미생활의 '이유'로 삼지 않겠다.

 

(취미에선 이유가 아닌 동기를 찾아야 하며 그 동기란 재미이다.)

 

5년 지난 일이라도 오늘에서야 절실하다면 오늘 쓸 것이며 

 

5천만원짜리 여행을 갔다왔다 한들 내일 벌어질 일이 더 궁금하다면 내일 일을 쓸 것이고 

 

글쓰기보다 게임이 더 재밌다면 게임을 할 것이다.

 

 

 

나심 탈렙의 안티프래질을 읽는 중인데, 이런 생각들과 관련하여 너무나 와닿는 부분들이 많았다. 

 

무작위성과 관련한 기분 좋은 감정이 하나 있다. 우리는 스포츠 관람에서부터 라스베이거스에서 숨을 죽여가면서 실제로 하는 도박에 이르기까지 적당한 (그리고 아주 익숙한) 게임의 세계를 좋아한다. 이번 이야기를 쓰고 있는 나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를 잡고 나를 놀라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면서 꽉 짜인 부담스러운 계획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글을 쓴다는 것은 모험에 따르는 흥분이 생길 때에만 가치가 있다. 나는 이런 흥분 때문에 책을 쓰는 것을 좋아하지만, 사설 반대면에 나오는 750단어짜리 칼럼이 주는 속박은 싫어한다. (p.102)

 

인생을 일종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금방 싫증이 난다. (...) 삶은 무작위성을 띠는 자극으로 이루어지며, 좋든 싫든 간에 과업으로 여겨야 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위험하다. 그러나 결코 따분하지는 않다. (p.103)

 

어떤 작가는 화가들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지만, 작가들은 '글을 썼다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자신과 독자들을 위해서 글쓰기를 당장 중단하라고 말하고 싶다. (p.193)

 

실제로 나는 이 책을 꾸물거리면서 쓰고 있다. 내가 한 부분의 글쓰기를 뒤로 미루면, 그 부분은 삭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간단한 윤리다. 나는 자연스러운 동기도 없는 상태에서 글을 쓰면서까지 많은 독자를 우롱하고 싶지는 않다. (p.193)

 

확실히 두 사람은 비슷한 캐릭터를 지니고 있다. 시간이 많고 여가를 자유롭게 즐긴다. 토니의 경우, 이런 여가는 생산적인 통찰력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또한 두 사람은 논쟁을 즐기고, 수동적으로 텔레비전을 보거나 콘서트홀에서 음악을 듣는 것보다 활발한 대화를 중요한 엔터테인먼트로 생각한다. 게다가 글쓰기를 싫어하는 점도 닮았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자신의 발언이 결코 완결된 것이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이 갖는 확정적이고도 변하지 않는 성질을 싫어한다. (pp.386-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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