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거다 리스, 도박 본문
도박의 동기
- 운명적 상황에서 성격을 창조하고 과시하기 위해서
- 기술을 발휘하고 존경을 얻기 위해서
- 이기고 대가를 얻기 위해서
- 게임 그 자체, 참여와 경험 그 자체를 위해서
- 우연과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이 선택받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
상업화의 과정에서 딜러들은 점차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고정된 승률이 제공하는, 보다 예측 가능하고 보다 안전한 수익에 의존하게 됐다. 자신들이 운영하는 게임을 사람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상업 세력-도박장-은 승리가 보장되는 기발한 변화를 꾀했다. 그들은 게임에 참가하는 대신, 게임에서 완전히 빠져나와 자신들에게 패배를 강요했던 바로 그 법칙과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확률 등식 안에 넣음으로써 뒤에 가만히 앉아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대수의 법칙이 작동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뿐이었다. 확률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힘의 지지 아래, 도박장은 결코 패배할 수가 없었다. 반면 승률과 도박장의 연합은 개인 도박자가 게임에서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도박자는 모든 테이블에 고정 좌석과 무제한의 재원을 가진 보이지 않는 적수와 경쟁해야 했다. 더구나 도박자는 도박장을 상대로 게임을 하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러한 경쟁 구도가 상업적 게임에 자리 잡았고, 이제는 게임의 고유한 성질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도박자들은 더 이상 서로를 상대로 싸우지 않고 도박장을 상대로 싸웠고, 도박장의 보이지 않는 비인간적인 힘은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과 쌍둥이 형제였다.
상업화는 또한 더 가난한 사람들의 참여를 조장함으로써 게임의 사회적 구성을 변화시켰다. 판돈이 적어짐에 따라 참여는 극적으로 증가했다. 확률의 철칙 뒤에 숨은 도박 사업가들은 게임의 판돈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수를 늘림으로써 이익을 창출했다. 거액의 베팅은 없어졌지만, 많은 숫자의 참가자들이 적은 판돈의 정기적 유입을 보장해줌으로써 도박장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도박의 성격이 상업화를 통해 변형됨에 따라, 도박 경험 자체도 변화를 겪었다. 승리 그 자체가 아니라 참여가 매우 중요하게 되었고, 도박의 의미 자체가 변했다. 이를 핀들레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이기기를 바랐다. … 그보다 사람들은 베팅을 하나의 상품으로 간주했다. … 판돈을 잃어버리는 대가로 구입할 가치가 있는 경험으로 간주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도박은 마침내 상품화에 굴복했다. 그러나 도박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도박은 독특한 경험과 관련된 부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계속 도박을 하는 것은 경제적 소득 못지않게 게임의 스릴과 흥분을 위해서이다. 승부가 빨리 결정되는 게임과 적당한 판돈이 게임 시간을 늘리고 따라서 흥미를 극대화한다고 가치를 인정받게 됐다. 도박자의 주된 동기는 참여이고, 단순히 게임을 하기 위해 게임을 했다. '따는 기쁨 다음 가는 것은 잃는 기쁨이다. 그러나 정체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라는 말은 이를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상업화 과정에서 특이한 도박 유형이 출현하게 됐다. 그것은 표면상의 현격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17세기 귀족의 도박과 공통점을 공유하는 도박이었다. 결정적으로 양쪽 모두에게 돈은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게임의 수단으로만 기능했다. 귀족의 큰 판돈은 돈에 대한 무관심을 보여줬고, 귀족들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참여하기 위해서 게임을 했다. 19세기 도박자들의 작은 판돈은 일견 귀족들의 거액의 베팅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같은 목적을 위해 기여했다. 즉 참여를 연장시키는 것이다. 돈은 단지 게임의 수단이었고, 돈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은 놀이 자체에 대한 참여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의 도박자들에게도 역시 발견된다. (pp.161-163)
여기에서 한 가지 유념해야할 것은 우연의 게임과 기술의 게임의 분석적 구분은 다소간 인위적이라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든 게임은, 도박자의 기술적인 예측에 가장 적합한 게임들조차도, 우연의 요소를 담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명시한 구분은 절대적인 분할이 아니다. 포커와 같은 게임에서조차 승자는 좋은 카드를 받고 상대가 나쁜 카드를 받는 것에 달려 있고, 경마 예상에 관련된 모든 기술도 마지막 순간에 비가 오거나 말이 아프게 되면 쓸모가 없게 된다. 아무리 기술이 뛰어나다고 해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고 완전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우연은 세계의 존재론적 특질이기 때문이다. 우연의 영향은 도처에 널려있고 도박의 결과는 항상 우발적인 사건이다. (pp.190-191)
도박이 일종의 환상 세계로서 일상생활의 일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은 도박에 몰두하는 동안 사람들이 평상시 자신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제약들로부터 일시적으로 해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습관으로부터 해방된 도박자는 자기 자신이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하고, 존재의 대체 방식을 개척할 수 있다. 카이유와 고프먼은 모든 놀이는 가공의 인물이 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고 지적했다. 즉 놀이를 하는 동안 지속되는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일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 이 유동적인 '도박 자기정체성'은 도박자가 일상적인 자기 자신을 버리고, 도박 상황에 보다 적합한 또 다른 페르소나를 채택하는 것이다. 습관과 일과의 중지, 친숙한 주변 환경의 제거를 통해 한 개인이 가진 성격의 준거 틀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방향 감각의 전통적 범주들이 느슨해지고 변경됨으로써, 도박자의 자기정체성의 축이 흔들리고 새로운 역할을 탐고하고 창조하도록 허용한다. 카이유와가 설명했듯이, 도박자가 일상 세계를 버릴 때, 도박자는 또한 자기 자신을 버린다. (pp.263-264)
도박판에서 위험을 취하는 것, 또는 고프먼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신을 운명에 노출시키는 것은 품성-또는 체면(face), 자기 규율, 용기, 정직과 같은 자질들-을 과시할 수 있고, 다른 데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능력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하나의 사회적 상황을 만들어낸다. 도박자가 자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홀로 책임을 진다는 사실 그리고 게임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만들 수 있다는 사실 때문에, 도박은 도박자 쪽에 일정 정도의 독립성을 부여한다. 쿠지진에 따르면, 바로 이것 때문에 도박자는 자기 가치를 확인하게 되고, 도박이 도박자의 존재를 승인 받는 곳이 된다. 어느 도박자가 남긴 다음의 말에는 이러한 측면이 잘 드러나 있다.
"도박은 우리가 어린이 때 가졌던 판타지의 대체물이다. … 나에게 도박에서의 판타지는 금전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취의 문제이다. 나의 진정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일들을 능숙하게 처리하고 관여함으로써,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pp.265-266)
도박자는 일반적으로 승패의 가능성 그 자체에는 무관심하다. 도박자의 목표는 단순히 게임의 흥분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된 관심사는 무한히 게임을 계속하는 것이다. … (pp.288-299)
도박의 동기는 게임의 다양성만큼이나 이질적이다. 사교(예를 들어 빙고를 하는 여자들이나 슬롯머신을 하는 젊은이들), 금전적 이득(예를 들어 복권), 기술의 발휘(예를 들어 경마 예상) 등이 여러 도박 경험의 중요한 요소라고 거론되지만, 이 모든 차이에 깔려 있는 공통적인 요소는 게임의 흥분, 또는 스릴의 추구를 본질적으로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흥분의 추구는 모든 도박 형태에 존재하는 것이고, 돈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과 승패에 무관심한 것이 도박에서 근본적이다. (p.289)
도박에서 돈의 역할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게임의 언어로서 그리고 스릴의 구성 요소로서 필수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자체가 게임을 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일단 게임 안에 있게 되면 즉시 무가치한 것이 되어버린다. 이러한 모순에 대해 보드리야르는 '도박의 비밀은 돈이 가치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돈은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게임을 하는 도박자에게 돈이 어떤 효과를 갖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핵심은 게임 그 자체이다. 맹세컨대, 돈에 대한 욕심은 아무 관계가 없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반면 리차드슨은 자신과 돈의 관계를 좀 더 차분하게 이렇게 설명한다.
"도박은 돈에 '삶의 조건에 필요한 수단적 성질'을 부여했다. 내가 산소나 햇빛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원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돈으로 무엇인가를 하고자 원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현금이 나의 개인적인 발전을 위해 필요한 요소가 되어 있을 따름이다." (p.291)
도박자는 승리를 위해서 또는 돈을 위해서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돈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다. 사실 도박자가 단조로운 게임에서 계속 이기게 되면 쉽게 지루해진다. 리차드슨은 단지 이익을 위해서 포커를 하는 시기를 거쳤다. 그 결과를 그는 '나는 매일 이기는 것이 지겨웠다. … 게임은 단지 공허한 노동에 불과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우연의 요소, 즉 모든 것을 잃을 위험이 없는 게임은 스릴을 없애 버리고, 단순히 단조로운 노동이 되어 버린다. 이 효과는 최고 수준의 포커 도박사들의 행동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집중된 노력과 기술을 통해 많은 돈을 딴 후에, 크랩이나 룰렛 같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도박에 베팅을 해서 그 돈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다. (p.292)
바타이유의 지출의 개념은 도박이 만들어 내는 흥분의 경제적 대응물이다. 그것은 원시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집단에서는 실현되고, 부르주아 사회의 경제적 공리주의에 의해서 부정된 무작정 뛰어들고자 하는 욕망을 나타낸다. 도박은 돈에 대한 무시가 지배하던 비자본주의와 17세기 이래로 지배적이었던 합리성이 역전되는 장소로 볼 수 있다. 게임을 하는 동안 도박자의 부에 대한 태도는 이 비생산적 지출의 유형에 포함되는 것이다. 부의 합리적 축적에 관심이 없는 도박자는 순전히 게임 자체-자기실현, 지위, 순수한 즐거움-를 위해 게임을 한다. 17세기의 귀족은 도박에 전념하는 것으로 그리고 도박의 토대인 금전적 계산에 대한 무관심을 통해 명예를 과시했다. 마찬가지 맥락으로 현대의 도박자는 게임의 추구에서 본질적으로 행위 자체를 위한 행위를 하면서 비생산적인 지출을 통해 인격을 과시하고 자아를 실현한다. (pp.300-301)
도스토예프스키는 진정한 도박자는 이기기 위한 천박한 욕망에서가 아니라, 게임 그 자체를 위해서만, 즐거움을 위해서만 게임을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스타일의 도박에서, 우리는 돈의 경시, 위험과 우연에 대한 의도적인 추구 그리고 자아의 실현을 볼 수 있다. 이것들은 바로 니체의 우화적인 주사위던지기에 담겨있는 가치들이다. 부르주아 윤리의 가치들을 노예근성으로 거부하고, 귀족적 고상함과 도도한 가치들을 지지하는 철학에서, 주사위는 지구를 향해 던져져 하늘 속으로 떨어진다. …
좋은 도박자는 짜라투스트라처럼 이성과 논리를 거부하고 적극적으로 우연을 취하면서 반(反)합리적이어야 한다. 규칙과 시스템은 폐기되고 우연은 단 한번의 전부 아니면 전무인 주사위던지기로 승인되어야 한다.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리자면, 모든 것을 걸고 무작정 뛰어드는, 또는 우연을 긍정하는 도박자는 강자이고, 물러서고 금전적 이득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은 노예근성에 종속되게 된다. 니체에게 있어 성공적으로 게임을 한다는 것은 우연을 긍정하는 것이고, 이러한 태도가 바로 필연적인 승리의 숫자를 만들어낸다. 도박자는 전적으로 우연을 긍정하지 않고 이기기 위해 의식 있고 사려 깊은 던지기를 수없이 하기 때문에 패배한다. (pp.304-305)
니체의 말은 사실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 상업적인 우연의 게임에서 유한한 자금이 주어지면, 한번의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베팅이 최소한 큰 승리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 도박자가 작은 판돈으로 더 오래 게임을 하면 할수록, 도박장의 이윤이 도박자의 자금을 더 오랫동안 갉아먹고 자신의 몫을 챙겨 도박자는 결국 돈을 잃게 된다. 한번의 큰 베팅은 최소한 이러한 지속적이고 가차없는 침식 때문에 만질 수 없는 큰돈을 딸 기회를 준다.
우연의 긍정은 인격을 과시하고 위험 앞에서 용기와 명예를 보여줄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우연의 긍정은 또한 자아의 긍정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박과 지위, 위험과 품위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p.306)
우연의 게임과 기술의 게임은 여러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금전적 이득에 대한 경시라는 면에서는 다르지 않다. 양자에서 공히 도박의 일차적 동기는 돈이 아니라, 오히려 주사위던지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열망이다. 즉 인격, 용기 그리고 게임을 의미 있게 만드는 자아의 긍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당조의 승리가 상징하는 부르주아 정신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예프스키와 리차드슨과 같은 이후의 도박 세대들은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게임 자체를 경험하기 위해 계속 게임을 했다. 현대 도박자의 태도는 금전적 이득이라는 합리적 목표에 의해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펼쳐지는 게임에 의해서 고양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도박, 자아실현, 고프먼의 체면 등의 상관관계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도스토예프스키식의 무작정 뛰어드는 것이 상징하는 이성의 포기는 부르주아 스타일-망각 대신 자기의식, 과도함 대신에 절제의 규율에 의해 영원히 제약받는 스타일-의 게임을 비꼬고 있다. 그런 도박자들은 위험을 전혀 취하지 않음으로써 결코 모든 것을 잃지는 않겠지만, 또한 어떤 가치도 영원히 얻지 못한다. 그들의 가장 큰 보상은 극도의 지각 있고 조심스러운 플레이를 통해 겨우 얻게 되는 돈 몇 푼일 따름이다. (pp.308-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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