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키플링 시 <요술 모자> 본문
2019년 12월에 인도 여행 가기 전에 읽고 갔던 키플링 소설 <킴>. 정말 많이 기대를 했는데 사실 명성에 비해 잘 읽히지가 않았다. 문학동네 버전이었고 뭔가 번역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진짜 이상한 번역인 게 확실하다.
<킴>은 챕터 시작부분마다 짧은 시가 첨부돼 있는데, 챕터 4의 요술 모자(The Wishing Caps)라는 시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당시 인도 여행이라는 모험을 앞두고 위험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에 완전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만약 내가 행운을 돌보지 않는다면 / 행운은 틀림없이 나를 따라 오리니 하는 부분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있는 이북에서 원문을 뒤져서 찾아냈는데 이게 오히려 번역문보다 쉬웠다 ㄹㅇㅋㅋ 영어로 읽고 비로소 이해했다 진짜.
이걸 내가 번역한 것은 대충 이렇다.
행운이란 것은 숙녀는 못 되지.
빌어먹을 계집.
잔머릴 굴리고 인상을 쓰며 성질 고약한
다루기 어려운 사람.
인사해 보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인사할 것이네.
만나 보게. 도망가려고 분주할 터.
뼛속까지 성질 더러운 여자일랑 혼자 내버려 두게.
어느 새 소매를 붙잡고 매달릴 터이니!
후하시군요, 행운의 여신이시여!
베풀든 말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내가 행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행운이 나를 뒤쫓아올 것이니.
이걸 문학동네 책에선 이렇게 번역을 해놓았더군.
일단 그냥 읽어도 뭔가 한국어가 아닌 것처럼 어색하다. 가장 사악한 계집애로 살아 있다네!?! 누가 한국어를 이렇게 말함?
원문과 대조해 봐도 그냥 오역 투성이라서 내용이 잘 연결이 안되고 완전히 따로 논다.
kittle to lead or drive는 그 여자를 리드하거나 무슨 행동을 하도록 만들기가 까다롭다는 뜻인데 이걸 갖다가 '앞장서라고, 전진하라고 꼬드기네'라고 소설을 써놨다.
성질 더러운 욕쟁이 여자는 혼자 내버려두란 내용을 '욕을 퍼붓도록 내버려두라고'라고 번역해 놓으니 그 앞뒤로 내용이 연결도 안된다.
give or hold at your will이 의지를 붙들라는 뜻이라고? 이거는 ㄹㅇ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번역한 것 같다.
무엇보다, Good Luck을 '행운 있으라'라고 해놓은 게 제일 큰 문제다. 'Good Luck'이랑 'Fortune'이랑 '그녀'는 모두 동일하며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를 의미하는데, 번역문만 읽으면 저 셋이 다 따로따로 논다. 포르투나가 여성이라서 Luck과 Fortune을 여자에 빗대는 이 시의 핵심 컨셉을 못 살린, 문제가 심각한 번역이다.
내가 번역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 ㄹㅇㅋㅋ 그래서 요술 모자, 직접 번역해 봤습니다! (원문 링크)
인생은 주고 받는 것이라지만,
내겐 내어줄 것이 나 자신 뿐.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삶은 오직 한 번뿐.
끝내 버릴까? 그 다음 기회는 없지.
한번 살아 볼까? 어떻게?
물론 사내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
나머지는 행운의 여신이 알아서 할 것이네.
후하시군요, 행운의 여신이시여!
베풀든 말든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내가 행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계속 나를 따라올 것이니.
불운이란 것은 숙녀는 못 되지.
길바닥의 가장 범속한 여자라네.
누추하고 수상한 차림으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부끄러움도 없지.
한번 같이 걸어 보게나. 약점 잡힐 테지!
말을 건네 보게나. 그건 범죄라네!
그녀가 "안녕" 하고 인사하면 힘껏 밀쳐 버리게.
다시는 얼씬거리지 못할 것.
후하시군요, 행운의 여신이시여!
오늘 심기는 어떠하신지?
내가 행운을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녀는 얌전해질 수밖에 없지.
행운이란 것은 숙녀는 못 되지.
빌어먹을 계집!
잔머릴 굴리고 인상을 쓰며 성질도 고약한
다루기 어려운 사람.
인사해 보게.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인사할 것이네.
만나 보게. 도망가려고 분주할 터.
뼛속까지 성질 더러운 여자일랑 혼자 내버려 두게.
어느 새 소매를 붙잡고 매달릴 터이니!
후하시군요, 행운의 여신이시여!
나는 따르지도 달아나지도 않을 것.
내가 행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행운이 나를 뒤쫓아올 것이니.
키플링은 옛날 아저씨니까 마인드가 다소 고루한 거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셨으면 한다. 게다가 포르투나 자체가 원래 여자고 행불행이란 것은 워낙 예측불허니까 성질머리 더러운 여자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집착하던 것에서 관심을 거둬버리면 도리어 그쪽에서 매달리고 보채는 건 거의 진리인 것 같다. 그러니 예측 불허의 말괄량이 같은 행운을 내 뜻대로 다루려고 하기보다는, 그냥 내버려 두고 내 갈 길을 가는 것이 우월전략이겠지.
이 시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몰라도 나 역시 지난 인도 여행에서 그렇게 했다. 폭설이 있을 수 있는 북부 지방 히마찰 프라데시주를 여행하기로 주사위를 던졌고, 다행히 내내 포르투나가 따라와서 매번 6이 나왔다.
포르투나 여신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도 등장한다. 이 역시 아주 좋아하는 내용이라, 밑줄 친 부분은 페이스북 Favorite Quotes에도 올려놓았다.
저는 운명은 가변적인데 인간은 유연성을 결여하고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기 때문에, 인간의 처신방법이 운명과 조화를 이루면 성공해서 행복하게 되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해서 불행하게 된다고 결론짓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중한 것보다는 과감한 것이 더 좋다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운명은 여성이고 만약 당신이 그 여성을 손아귀에 넣고 싶어 한다면, 그녀를 거칠게 다루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보다는 과단성 있게 행동하는 사람들에게 더욱 매력을 느낀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운명은 여성이므로 그녀는 항상 청년들에게 이끌립니다. 왜냐하면 청년들은 덜 신중하고, 보다 공격적이며, 그녀를 더욱 대담하게 다루고 제어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거칠게 다루다,,,에서 저처럼 이상한 생각 하지 마시고요,,,
저는 동의합니다. 리스크를 지고 과단성 있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멋있어 보입니다. 저도 그렇게 되고 싶고요.
여하간, <킴>은 2019년도 인도 여행에서 나름 중요한 소재였기 때문에 당연히 글로도 뭔가 남기고 싶다. 나는 다람살라에 갔었는데 킴에는 티베트 라마가 등장한다. 킴이 방문했었던 곳이자 영국령 인도의 여름 수도였던 심라를 나도 갔었다. 킴이 이동한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나 역시 밤버스로 달리며 너무 설렜었다. 인도에 킨들을 가져갔었는데 그때 읽던 책도 Quest for Kim이다. 킴의 발자취를 좇아다니며 그레이트 게임 이야기를 하는 책인데, 이 책 저자가 <실크로드의 악마들>도 썼고 <그레이트 게임>도 썼다. 피터 홉커크 이 사람은 한결같이 내가 재밌어 하는 주제만 다뤘다. 이 사람 책 전부 다 읽어 버려야지.
근데 킴은 의외로 재미가 없었고 번역이 정말 별로였다. 국내 번역본이 두 종류 보이는데 둘다 그 이상한 번역자 작품인 것 같아서 읽기 싫다. 번역이 문제인 건지 스토리 자체가 별로인 건지 알아내려면 어쩔 수 없이 원문을 봐야 될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소설이 안 읽히는 병에 걸린 마당에 영어로는 언제 읽겠어.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못 해치웠다. 언젠가는 그래도 읽어볼 것이다. 킴의 뒤꽁무니를 따라다니지 않는다면 킴이 따라오든지 하겠지 뭐!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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