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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

bravebird 2021. 2. 12. 02:26

나는 이중적이거나 모순적인 것들이 하나로 결합돼 있는 오묘한 것을 예전부터 아주 좋아한다. 제정 러시아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라든지, 얼핏 보기에 섬세하지만 상당한 힘을 요하는 발레라든지, 동서양이 기묘하게 혼합된 홍콩이라든지, 노자 도덕경의 대교약졸 대용약겁 대지약우라든지, 낮져 밤이라든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에 나열한 게 너무 거창해서 밸런스패치 한 겁니닼ㅋㅋㅋ)

근데 주사위야말로 정말 딱 저런 신기한 것이다. 우리는 주사위를 던지면서는 우연을 긍정하며, 주사위가 떨어질 때는 필연을 받아들인다. 우연과 필연, 즉 도전과 승복이라는 제일 멋진 것들이, 아이들조차 이해하는 조그만 육면체 하나에 전부 깃들어있는 것이다. 아래는 dice symbol이라고 검색해서 들어간 타투 사이트에 소개된 주사위 상징의 의미.  

roll with the punches는 '힘든 상황에 적응하다'라는 뜻으로, 펀치가 빗발치는 속에서 이리저리 구르기한다는 비유가 재미있다. 


아래는 찰스 부코스키 시 '주사위를 던져라' 혹은 또다른 번역으로는 '끝까지 가라'. 내가 키플링의 If와 함께 곁에 두는 몇 안되는 시다. 그렇다는 것은 매우 쉽게 직설적으로 쓰였다는 뜻이므로 번역 생략했다. 거의 즉자적일 만큼 쉽게 쓰였다.


오늘 읽은 『우연을 길들이다는 세계가 결정론적으로 움직이는지(라플라스의 악마) 아니면 세상의 운행에는 우연이 작용하는지(세상은 주사위 놀이하는 신들의 도박대)의 문제를 두고 통계학과 철학이 어떻게 발달해 왔는지에 대한 내용이다. 기대하고 읽었지만 좀 낯설고 어려웠는데, 그 중 역시 제일 재밌었던 건 역시나 우연의 고귀함을 이야기하는 니체 챕터였다. 니체 하면 또 주사위다. 내가 최근에 던진 주사위는 여러 가지 있지만 아무래도 인도 여행이고, 이때 니체 책을 가지고 갔었다.

인도에서 가장 가고 싶었던 히마찰 프라데시 주는 히말라야 산맥이랑 붙어있는 인도 북부의 주다. 겨울에 폭설이 잦아 길이 폐쇄되면 며칠 고립되거나 트레킹이 불가능해질 수 있다. 당시 일기예보에도 눈 소식이 일주일 내내 있었다. 그래도 한번 가보기로 주사위를 던졌다. 

인도는 역시 호락호락하지가 않은 예측불허의 땅이었다. 뉴델리에서 다람살라(맥로드 간즈)로 가야 되는데, 짙은 운무 때문에 국내선 비행기가 갑자기 취소됐다. 다음 비행기에 대한 기약도 전혀 없었다. 그렇게 설계가 망가진 덕분에 뉴델리 시내에서 삼천포에 빠져 느긋한 하루를 보내고, 지금까지도 소식을 나누고 같이 게임도 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이 이야기는 이전 글로도 썼다.)

이때 만난 친구에게 『여행하는 인간』이라는 책을 선물했는데 여기서도 우연과 불확실성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음


그 다음날 버스를 구해서 밤새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달려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동이 터오는 새벽에 안전한 곳을 찾다 보니 달라이 라마 사원을 먼저 한 바퀴 돌았다. 그 다음 숙소 체크인 전에 점심 무렵까지 시간을 때워야 해서 Moonpeak Cafe에 앉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 읽어버리고 말았는데 거기에 이런 구절들이 있다. 


  세상은 주사위 놀이 하는 신들의 도박대다.

  우연,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유서 깊은 고귀함이며, 나는 만물에 이것을 되돌려 주었다. 만물을 목적이라는 속박으로부터 구해준 것이다.
  



니체는 세상이 우연의 산물이기에 미리 정해진 목적 같은 것은 허상이라고 봤다. 그는 그 어떤 목적에도 종속되지 않고 1이 나오든 6이 나오든 아랑곳없이 주사위 던지는 것 자체를 계속 새롭게 반복하는 초인(위버멘쉬)을 찬미한다. 


우리는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와 아이들의 주사위 던지기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그 두 가지 모두 어떤 반복을 나타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학자들의 경우엔 그것이 ‘동일한 법칙’의 확인, 다시 말해서 동일성의 반복으로 나타나고 있다. 반대로 아이들의 경우에 반복되는 것은 새로운 상황, 새로운 사건들을 만들어내는 ‘던지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서 아이들의 주사위 놀이에서는 ‘행위의 반복’, ‘생성의 반복’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새로움의 반복’,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276)



학자들의 주사위 던지기는 대수의 법칙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다. 주사위를 던지는 한번 한번의 시행 사이에는 그 어떤 차이도 없어서 서로 구별이 불가능하다. 결국 단순 노가다의 무한 반복이다. 반면 아이들은 주사위 던지는 그 자체를 매번 새롭게 경험한다. 1이 나오든 6이 나오든 계속 던지고 매번 신기해한다. 

나도 지치지 않고 계속 주사위를 던지는 플레이어가, 도전자가 되고 싶다. 삶이 나한테 시비를 걸어올 때 응수만 하는 카지노 딜러 같은 사람 말고, 타이밍과 전장을 직접 고르는 플레이어였으면 좋겠다. 남의 도전을 계속 받아야만 하는 챔피언 말고, 나만의 타이밍에 나의 홈그라운드에서 챔피언에게 승부를 요청하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자였으면 좋겠다.

갑자기 록키 보고싶네. 이번 연휴에 보고 싶은데 우리집 티비로 보려면 비싼 OTT 가입해야 됨. ㄷㄷ

www.youtube.com/watch?v=GvQkl7qa6RQ

 

작년말에 록키 티셔츠 입고 오마주 ㅋㅋㅋ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꽤 그럴싸함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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