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 - 대용약겁 본문
연휴라 부모님 댁으로 돌아와서 두문불출하고 있다. 예전에 빌려 읽고 하도 마음에 들어서 전역한 동생한테 선물로 줬던 『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를 다시 꺼내 읽었다.
이 책은 캐나다 전투조종사 출신이며 우주비행사로 일했던 크리스 해드필드가 썼다. 모든 부분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서 온 동네 선물하고 싶을 정도이지만, 그 중 가장 반직관적이면서도 그저 근본 뿐인 챕터 하나가 있다. 「부정적 사고의 힘」.
요즘 블로그에다 자기계발 느낌 나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 난 자기 발전에 관심이 많지만(두려움이 많아서이다) 자기계발 콘텐츠는 별로 안 좋아한다. "하면 된다"와 같은 무한긍정 자기착취 이야기는 특히 믿고 거르는 편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게 분명히 있다. 노력은 성공의 충분조건이 아니라 필요조건일 뿐이다. "세상에는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이 있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가 내 생각이다. 가망도 없는 일에 남 보기 좋으라고 무식하게 힘 빼는 건 그냥 광기다.
크리스 해드필드의 이야기는 "하면 된다", "해 봤어?" 따위 오만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우주비행사가 되고 난 후의 지난한 훈련 과정에 지면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헬멧에 묻은 청소 용액 한 방울이 눈에 들어가서 시야를 막아버릴 수 있는 것이 우주비행이다. 우주비행사들은 이렇게 매우 작고 하찮은 일을 미리 대비하며 진땀을 뺀다. 실제 발생한 사고와 잠재적인 돌발 상황에 대해 철저하게 피드백하고 모의 훈련을 하며 교훈을 서로 공유한다. 이처럼 발생 가능한 '최악의 사태'를 미리 떠올려 내고 만반의 준비를 함께 갖추는 '부정적 사고'를 통해 오히려 안정감을 얻는다.
내 경험상 두려움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를 때와 곧 생길 일에 대처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생긴다. 도통 뭐가 뭔지 모를 때 우리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두렵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할지 전혀 모를 때는 모든 것이 두려움의 대상이다. (p.74)
어떤 것에 준비가 되었다고 해서 확실히 성공한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누구나 성공하길 바라지만, 제대로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무엇이 잘못될 수 있는지 이해한다는 뜻이며, 이에 대처할 계획이 있다는 뜻이다. (p.77)
위험이 많이 예상되는 상황보다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자체를 모르는 상태가 훨씬 더 위험하다. 잠재 위험을 헤아릴 수 있으면 대비를 할 수 있다. 진짜 위험한 것은 자기가 뭘 모른다는 것, 무언가 잘못될 수도 있다는 것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으면서 대책없이 "하면 된다", "온 우주의 기운이 나를 도와준다" 하고 뽕 맞은 소리만 하는 것이다. 이런 걸 한마디로 무대뽀라고 한다.
우주비행사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은 터무니없는 편견이다. 대체로 우리는 매우 체계적이며 세심하다. 우리는 짜릿함을 좇기보다는 묵묵히 준비한다. 납세자들이 낸 세금으로 사들인 엄청나게 비싼 장비를 다루기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리고 우주비행사의 삶을 위한 최고의 보험정책은 훈련에 몰두하는 것이다. 자동으로 반응할 수 있기까지 연구와 시뮬레이션, 훈련을 거듭한다. 나사의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죽을 확률을 낮추기 위해서. (p.89)
낙천성과 자신감은 내가 유별나게 행운아라고 여겨서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성공을 마음속으로 생생하게 그려본다고 나오는 것도 아니다. 평생 실패를 떠올려보고 이를 막을 방법을 찾아온 결과다. 대다수의 우주비행사들처럼 나는 인생에서 마주칠 일에 잘 대처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일이 잘될 때는 물론이고 잘못될 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늘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부정적 사고의 힘이다. (p.98)
우주비행사들은 우주탐험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며 이 일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돌발 사고 현장에서의 대처뿐 아니라 동료가 목숨을 잃었을 경우 그 가족을 도울 방법, 자신이 목숨을 잃었을 경우의 유서까지 다 준비해 둔다. 모든 가능한 상황을 최대한 대비하고 훈련해두었기에 오히려 자신감 있게 비행에 나선다.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회사가 정말 끔찍하게 싫었던 시절이다. 당시 학업을 잇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허겁지겁 시험을 봐서 붙은 회사를 억지로 다니고 있었다. "하면 된다", "해 봤어?"라고 하는 바로 그 회사였는데 문화나 업무 내용이나 사람들 성향 그 모든 것이 나와 상극이었다. 이곳에 적응한다는 것은 곧 정신적인 죽음이라 여겨졌을 정도로 파렴치한 일들을 많이 목격하거나 직접 당했다. 회사에서도 괴로웠지만, 이렇게 싫은 것을 당장 그만두고 원하는 일에 투신 못하는 자신이 못났다는 생각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런 시절에 이 「부정적 사고의 힘」을 읽은 건 일종의 구원이었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멀리서 통학하면서 공부하는 것의 피곤함을 학부 때부터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전형적인 K-장녀 성격상, 경제적 안정에 대한 불안감이 앞으로 공부하는 데 있어, 특히 특출난 재능도 없는 나에게는 특히 걸림돌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또 전공을 한번 대차게 바꿔보고 이것저것 기웃거려본 경험 때문에, 어떤 분야의 대학원을 가봤자 또 딴 분야에 한눈이 팔릴 것도 알았다.
이 부정적인 사고 내지 겁 때문에 그냥 회사에 쭉 남았다. (중간에 한번 이직은 했다.) 몇 년 지나서 생각해보니 그 겁이 또 한편 용기였던 것이, 나는 겁을 내고 일단 물러나야 할 때를 알아서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때 뒷걸음친 덕분에 지금은 낮에 돈 벌고 남는 시간에 좋아하는 공부를 취미로 할 수가 있다. 공부에 직업적인 성공을 걸지 않아도 되므로 남 눈치를 볼 필요도 없으며, 마음 가는 것은 뭐든 원하는 만큼 배울 수 있다. 스스로 번 돈이므로 뭘 하든 떳떳하다.
진지한 공부를 영영 포기한 것도 아닌 게, 은퇴하고 나서 중국사 대학원 과정을 이어가볼 생각이다. 나이 먹고 나서 쉽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다. 당장 은퇴가 언제쯤일지,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모습의 은퇴일지, 그때 경제적으로 충분히 안정이 되어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어서 내심 불안하다. 하지만 공부를 더 해볼 생각을 놓을 뜻이 아직 없기 때문에, 저걸 실현하기 위해 오늘 해두면 좋을 행동을 매일 하려고 한다. 이왕 하는 일 잘하려고 하기, 심신 건강 챙기기, 돈 벌어 헛되이 쓰지 않고 불려두기, 책 읽기, 필요한 외국어 공부해 두기, 친구 사귀어 두기, 여행하기...
성공이고 자기 계발이고 경제적 자유고 결국 다 부차적이다. 그냥 내 하고 싶은 것을 내 돈으로 떳떳하게 남한테 피해 안 주면서 하고 싶을 뿐이다. 그러려다 보니 돈이 필요해서 싫은 일도 해야 될 때가 있었고, 싫은 일을 하려다 보니 서툴고 모자란 것도 많았고, 그래서 용기가 필요할 때가 많다. 그 용기를 내야 하는 순간에 이제는 '가능한 최악의 상황을 알고 있는가? 대비했는가?'처럼 제일 겁쟁이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데, 내겐 이 겁 많은 질문이 용감한 의사결정에 큰 도움이 된다. 크리스 해드필드는 겁내고 두려워하며 물러나 대비하는 것이 도리어 큰 용기일 수도 있다는 걸 내게 최초로 알려준 사람이다. 그 다음이 대용약겁(大勇若怯, 진정한 용자는 도리어 겁내는 듯하다)을 말한 노자다.
www.youtube.com/watch?v=KaOC9danxNo
우주선 안에서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를 연주하는 크리스 해드필드. 이 비디오를 처음 보았을 때는 이 사람이 이렇게 근본 뿐인 책까지 썼다는 걸 몰랐다. 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I can do를 Planet earth is blue and there's nothing left to do로 개사한 센스! He's all set!
소름인 게 이거 전회사에서 만든 테스트인데 나 정주영 나옴 ㅡㅡ 전혀 공감이 안됨.
"이봐, 해봤어?" 라니 개얄미워서 콱 쥐어박고 싶다ㅋㅋㅋㅋ 안해요 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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