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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meditatio Malorum (최악의 일에 대한 예견)

bravebird 2021. 2. 25. 00:41

2/23 화요일 어제 수술을 하나 받았다. 국소마취였고 절제 과정은 초음파로 말똥말똥 다 지켜봤다. 수술대에 눕고 나서 끝날 때까지 5분도 걸리지 않은 듯 하지만, 어쨌든 몇 년 전부터 몇 번째 이런 수술과 조직 검사를 받고 있다. 지금은 조직 검사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별 문제 없다는 결과일 확률이 높으므로, 결과의 불확실성이 아직 남아있는 지금 써야 좀 더 유효한 내용이 될 터라 지금 써둬야겠다.

수술이 별 것 아닌 것에 비해서 6시간 입원이 필요했는데 그동안 세네카 책을 읽었다.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는 스토아 철학자인데, 나는 내가 자주 하던 생각이 스토아 철학자들의 생각과 아주 비슷하다는 걸 잘 모르고 있었다. 



비슷한 점 여러 가지 중에서도 특히 얘기하고 싶은 것은 Premeditatio Malorum 즉 최악의 일에 대한 예견이다. 이건 크리스 해드필드의 『우주비행사의 지구생활 안내서』를 읽고 최근 쓴 글에서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바로 부정적 사고의 유용성이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대해 알고 있고 대비가 되어 있다면 두려움이 줄어든다. 난 이런 부정적인 사고도 가치가 있다는 걸 크리스 해드필드 덕분에 처음 깨닫게 되었는데, 그 훨씬 이전에 스토아 철학자들도 이걸 이야기했단 걸 세네카를 읽으며 처음 알았다. 병원에서 특히 반가운 내용이었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대비하는 것은 용기를 요하는 일에 대처하는 확실한 방법이 되어 주었다. 몇 년 전 말도 안되게 너무 가혹한 팀에서 완전히 지친 채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실제로 회사에서 잘릴까 무서웠었다. 해고 통지를 받는 상황을 미리 상상하고 근로계약과 취업규칙을 꼼꼼히 검토했으며, 온갖 인맥을 동원해서 부당 해고에 대해 조사해 두었다. 근로계약의 내용을 토대로 내가 주장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도 준비를 다 해놓았다. 가장 두려운 상황인 해고가 실제 닥친다면 뭐라고 대꾸할지 모두 대비해둔 채로 일했다. 최악의 상황을 미리 생각해보고 대응책을 강구해두었기 때문에 낙천적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번처럼 수술을 받고 조직 검사를 할 때는 암에 걸려 일찍 죽는다는 생각을 미리 해본다. 만약 그런 일이 닥친다면... 이대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급적 평범한 일상을 유지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적극적인 처치를 받고 병마에 맞설 것이다. 병이 없는 듯이 최대한 일상을 이전과 똑같이 영위할 것이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혹시 모르기 때문에 주변 정리를 깔끔하게 할 것이다. 블로그를 없애고 메일을 삭제하고 약간 남아있는 일기를 다 태우고 소지품을 줄이고 유언장을 미리 써놓을 것이다. 일단 나를 몰아붙이는 질병과 관련 있는 재단이나 의료기관에 일정 비중을 기부할 것이다. 내가 결혼하지 않았고 자식이 없는 상태라면 부모님과 친/외가 조부모님과 동생에게 물려줄 것이고, 결혼한 상태라면 아마 배우자와 자녀에게 주로 물려줄 것 같은데, 단 자식이 만약 충분히 성년이고 신체 건강하다면 자식에게는 남기지 않을 것이다. 자식 미안 ㅋㅋ 최선을 다해서 키울 테니 성년이 되고 나면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이 살아가렴. 



아 이게 지금 당장 이런 대처를 해야 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아마 지금까지 그랬듯 평범한 양성 종양일 것이다. 이렇게 수술을 하고 조직 검사를 받는 것은 물론 피하고 싶은 일이지만, 내게 정기적으로 삶의 유한성을 상기시키고 겸허함을 가르쳐 주는 장점도 있긴 하더라는 걸 얘기하고 싶었다. 나는 요즘 갖은 똑똑한 척을 하면서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처럼 살고 있지만, 실은 언제까지나 건강하지는 않을 것이며 삶은 유한하고 하루하루는 빌린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날인 병들어 죽는 날, 그 날까지 매 순간을 감사히 사용하다가 그대로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다시 한번 해본다. 

'모든 것은 빌린 것, 나중에 전부 다 돌려주어야 함, 소중히 사용해야 함.'
이런 생각도 자주 하는데 이것 역시 스토아 철학에서 얘기하는 것인지 정말 몰랐다. 

세네카 한번 읽어 보시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일어난 일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
불행이 일어나리라고 예견하고 대비한 사람 앞에서 그 불행의 위력은 줄어든다.
생은 유한하다. 모든 것은 잠시 빌려온 것이다. 소중히 사용하고 말끔히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크리스 해드필드나, 나심 탈렙이나, 러디야드 키플링이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모두 이 유한한 삶이라는 운명 앞의 아파테이아를 얘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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