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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주의'

bravebird 2022. 3. 10. 14:42

문학 전공 시작한 후에 탈식민주의 이야기하는 교수님들 보고 그 분야 자체에 실망한 이유

= 현 여당의 행태를 굉장히 안 좋게 보게 된 이유

뿌리가 완전히 동일하다.

 

번역이 난삽하기는 하지만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이라는 책에 '마오주의'라는 키워드로 잘 정리되어 있다. 옛날에도 남긴 적 있음.

 

요약하면, 약자의 정의를 부르짖을수록 자기 봉급과 권위가 올라가는 사람들을 왜 믿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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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이 반드시 백인의 속성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마오주의자 역시 반드시 인종적으로 '백인'은 아니다. '백인의 죄'라는 말은 계속해서 권력과 결여를 서로 대치시키는 담론유형을 가리키는데, 그 담론의 화자는 제인 에어처럼 권력을 가지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무력한 것과 동일시한다. 이는 특권층 출신조차 특권의 '결여'라는 입장에서, 결여에 대해, 결여로서 말하는 경우가 더 많은 연유를 설명해준다. 마오주의자가 보여주는 것은,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원을 끌어내면서도 자신이 특권을 부여받은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산적 순환이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항상 자기담론의 물질적 기반을 은폐하면서 자신의 주장이 매우 순수하게 탄생한 것처럼 말한다. (pp.31-32)

우리는 지식인들의 싸움이 말을 통해 이루어지는 싸움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반체제적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 적과 조금이라도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니며, 지배의 중심부 또는 주변부에서 생존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의 짓밟힌 삶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도 분명 아니다. 따라서 학계의 지식인이 직면해야 하는 것은 사회 전체에 의해 자신이 '희생되었다'(또는 피억압자와의 연대 속에서 자신이 희생당했다)는 게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반체제적' 담론에 의해 축적되는 권력·부·특권이며, 자신의 말이 공언한 내용과 그런 말로부터 자신이 얻는 신분상승 사이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푸코가 지식인은 권력의 대상과 도구가 되는 것에 저항하여 싸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을 때, 그는 바로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었다.) (...) 결여로서의 타자에 대해 줄기차게 말하지만 봉급과 사례금이 계속 올라가는 그런 사람을 우리는 왜 믿어야만 하는가? 반체제적 담론의 의도가 기성체제에 의해 적정하다고 인정되는 것을 대체하고 부인하는 것일진대, 그 담론 자체가 적정한 것으로 전화되어버리는 상황에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하는가? (pp.35-36)

"전형적인 마오주의자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자본주의에 싫증난 문화비평가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작업을 지탱해주는 것과는 반대되는 사회질서를 원하는 문화비평가다. 따라서 마오주의자는 욕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최고의 사례이다. 마오주의자가 원하는 것은 항상 타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결과 자신이 아닌 것 또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과 찬미가 나타난다. 찬미되는 것은 종종 타자의 불행ㅡ가난을 '가지고' 있거나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ㅡ이므로, 마오주의자의 전략은 주로 자신의 수사를 가능케 해주는 물질적 힘을 수사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된다."

 

 

세상에는 '좋은 것'과 '희소한 것'이 불가피하게 존재한다. 이건 '그래야만 한다'라는 당위 차원이 아니라 '그냥 그러하다'라는 존재 차원의 이야기다. 세상의 자원은 한정돼 있기 때문이다. 기성의 '좋은 것'을 타파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봤자 새로운 '좋은 것'이 또 생겨난다. 기성 가치를 타파하려는 사람들도 결국은 그 '좋은 것'을 자신이 직접 만들든 빼앗든 부정행위를 저지르든 해서 어떻게든 갖고 싶어 하지 않는가.

 

이게 엄연한 사실인 이상 그냥 욕망에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추구하고 싶다. 돈이 적기보다는 많았으면 좋겠고, 집이 없기보다는 있었으면 좋겠고, 집을 하나만 가질 수 있기보다는 원한다면 여러 개 가질 수도 있었으면 좋겠다. 단 이 모든 과정에서 정정당당한 수단을 사용하려 노력할 것이다.

 

또한 일을 잘 못하는 게 분명한 정부의 시혜에 의존할 필요 없이, 나의 역량과 노력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는 정부 정책에 의존해서 정부가 주는 알량한 혜택을 받기 위해 '가난하지만 선량한 서민'이라는 만들어진 이미지에 스스로를 한정하고 싶지 않다. 살 길은 알아서 개척하고 싶고, 그 길을 정부가 최소한 방해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무엇보다 저기서 말하는 '마오주의자'처럼은 정말 안 되고 싶다. 불행한 타인이 계속 존재해야만 권력과 사례금과 봉급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싫다. 잘 살고 싶고 잘 되고 싶지만 가식적인 착취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난 중간인 거 같지만 내 가능성의 범위가 정부의 시혜 정도에 한정되는 것은 거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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