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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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유난히 다양한 감정이 오가는 가을

bravebird 2023. 10. 7. 01:25

연휴 3일 전 코로나에 걸렸고 7일간 꼬박 바깥 출입을 하지 않았다. 예약해둔 여행도 없고, 코로나 걸렸으니 친척 방문도 못하고, 아무 약속도 없고, 어디 갈 수가 없기에 거의 매인 것이 없는 온전히 자유로운 시간이었음. 이때야말로 내 소원인 은퇴자처럼 살아보기로 했음.
 
그때 내 자신이 대체 뭘 하는지 들여다보니
알람 무시하고 원없이 자기,
밀린 빨래하고 재활용품 정리하기, 방 청소하기 (3평짜리 방이라 물휴지로 한번 닦으면 끝남),
필요했지만 정보 수집이 필요했던 물건에 대해 찾아보고  구입하기 (색온도 조절이 가능한 책상 스탠드, 고데기),
인테리어나 가전, 가구 관련 정보 찾아보기,
책상에 다리 뻗고 그동안 보고 싶었는데 계속 미뤘던 애니메이션 보기,
방송통신대 과제하고 강의듣기,
한문 수업 듣다가 이상한 한자 찾아보면서 낄낄거리기,
뒤적뒤적 마음 내킬 때만 조금 책읽기, 
회사에 돌아가야 하는 개불쌍한 나 자신을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편지쓰기를 하고 있더란 말이다. (이런거 해본 적 없었는데 사실 상담에 한번 오랜만에 가볼까 싶어서 해본 빌드업 활동이었고 좀 신선한 기분이었다) 아마 할머니가 되면 이런 식으로 매일 생활하지 않을까 싶은데 너무 즐거워서 이 시간이 끝날 땐 망국민의 심정이었다.
 
내가 나 자신한테 생전 처음으로 편지를 쓰면서 발견한 점이 있다.
남이 나한테 해주는 위로나 응원의 말들을 나는 으레 하는 예의상의 말이라고 내심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혼자서 스스로에게 하는 가혹한 요구 같은 게 실은 진짜라고 생각했던 것 같음. 무슨 극기훈련 같은 정신상태 말이지.
근데 내가 나를 친구라고 생각하고 건네는 말도 결국 남들이 나한테 해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ㅋㅋㅋㅋㅋ
그리고 내가 회사에서 겪은 매우 안좋은 경험을 똑같이 겪는 분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한테 내가 드린 말씀도 사람들이 당시 내게 해준 말과 똑같았다. 여기가 전부가 아니라고. 여기 안에 갇혀서 생각하거나 너무 잘하려고 할 필요 없다고. 이미 충분하다고. 난 그 말을 믿지 않았어. 여기서 못하면(정확히는 회사 사람들 대부분을 만족 못 시키면) 다른 데서도 안될 거라고 생각했고 안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야.
근데 나만이 아는 부끄러움이라든가 흡족하지 못한 부분이라든가 하는 것을 생각하면서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채찍질 하는 극기훈련 모드의 사고 방식도 일말의 진실은 담고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해준 친절한 말도 역시 그러하며 둘 중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 다만 내가 옳고 그름을 중히 따지는 성향이고 고집이 세서 실은 내 생각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며 거기 얽매였던 것 뿐 ㅋㅋㅋ 사실은 정답이 없으니까 친절한 말을 취해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 자신이 소중하기에 내가 너무 부족한 것만 같고 그래서 너무 괴로운 느낌이 들 때가 있지만 그냥 좀 힘을 빼고 날 적당히 몇 년 알아온 친구가 나에게 해줄 법한 딱 그 정도의 친절한 말을 스스로에게 계속 해줄 수만 있어도 썩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것임 내가 중립중립 중립충 이게 내 병이긴 한데  딱 그정도로만 나 자신의 일을 생각하는 게 중립이고 균형이지 않을까 하는 것임 ㅋㅋ
 
연휴 마지막 2일간은 돌아다니면서 가전을 계약했다.
우선 첫날은 백화점에 가서 LG와 삼성을 비교. 그 겸에 가구 매장도 돌아보면서 소파에 직접 앉아보았다. 그날 거의 밤새도록 인터넷 검색을 통해 가전에 대한 정보를 추가로 수집해서 원하는 것이 뭔지 조금 더 구체화하고 LG 유명 판매 매니저도 검색해 보았다. 네이버 카페에서 "명예대명장"이라고 검색하면 실적 극상위티어 3년 연속, 고객만족도 전사 최우수 등의 쟁쟁한 기록을 찍은 판매 달인 분들이 나오는데 이 분들께 연락드려서 미팅을 잡고 방문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음날 명예대명장 두 분과 미팅한 후 두 번째 분과 바로 계약.
 
가전 구입을 위해 총 네 분의 LG 판매 매니저를 만났었는데 모든 분이 큰 도움을 주셨다. 다들 매우 유능하고 친절했는데 어쨌거나 매장마다 할인 조건이 다르므로 비교 견적을 해봐야 하기 때문에 다른 분들도 만났던 것이다. 그러면 앞분들이 내주신 이미 좋은 구성안을 바탕으로 좀더 미세조정해서 좋은 대안을 찾을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MECE한 선택을 매우 흡족하게 할 수 있었다. 더 찾아다녔으면 더 할인받을 방법도 있었겠지만 이 정도로 충분히 만족함. (더 이상은 좀 피곤하다. 난 빠른 결정을 좋아해. 이제 가구와 인테리어라는 큰 산이 남아있거든...)
 
내가 계약한 분, 그러니까 마지막에 만나게 된 분은 마침 현재 프로모션 조건이 좋은 매장에 근무하고 계셨다. 그래서 내게 가장 좋은 가격 조건을 제시해주실 수 있었는데 또 본인 자체도 LG 판매 최상위티어(전국에 몇명 없는 수준)에 해당하는 명예대명장에 고객만족도도 전사 1위하신 분이다. 만나보니 뭔가 달라도 달랐고 같은 직업인으로서 좀 숙연해진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이쯤은 해야지 정말 실력이 있다는 거구나.
 
판매 실적은 사실 어느 지점에 발령받는지에 매우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단 말임. 매장이 전남 무안인 경우와 강남구 청담동인 경우에 판매실적이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 분은 프로정신이 대단했다.
 
우선 처음 만났을 때 약속시간에 입구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랑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지 않고 혼자 태워 올려 보냈음. 볼일이 있어서 잠깐 있다가 바로 합류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먼저 2층에 도착해서 나를 맞이함. 처음 만난 사이이기에 어색하지 않도록 혼자 편히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라는 배려로 이해함. 이런 고객 응대 디테일에 일단 첫째로 놀랐음.
 
그 다음, 가전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 주심. 이미 앞선 매니저 분들이 엄선해 주신 상태였지만 스펙을 낮춰 구입해도 무리없는 품목들을 알려주셔서 지출을 줄여주심. 반대로 조금만 더 썼을 때 이득이 훨씬 커질 만한 유용한 품목도 제안해 주심.
 
그리고 가전을 한꺼번에 여러 개 사면 전체 결제액수 대비 할인이 얼마다 하는 식으로 체감가가 나오는데, 전체 할인율이 각 품목마다 스프레드된 품목별 가격비교 엑셀 시트를 직접 제작해 놓았다가 내 시나리오를 복붙해서 보여주셨음. 그러니까 전체 카드결제 액수랑 캐시백으로 돌아오는 할인 액수는 아는데, 그래서 원래 얼마짜리 냉장고를 얼마에 사게 된다는 거지? 고객으로서는 이게 은근 궁금한데 그걸 알긴 어려웠음. 바로 그 점을 해소해 주신 거임. 게다가 본인이 만든 이 엑셀 양식을 본인이 일했던 매장마다 배포해 놓은 것 같았음.
 
또 계약이 끝난 후에도 미세한 옵션변경을 하고 싶어서 물어봤는데, 색깔만 다른 게 아니라 기능이 다른 모델인 점과 예상 전기 요금까지 상세히 대답해 주고 바로 결제 변경도 해주심. 덕분에 에어콘과 공청기가 합쳐진 모델로 바꿈. 공청기를 따로 찾아보고 사야 하는 너무 귀찮은 일이 사라짐 개꿀 ㅋㅋ 안 그래도 공청기 분해청소 못하겠어서 샤오미 공청기 버린 사람이라 이번에는 그냥 에어콘에 일체화된 거 쓸거임 ㅋㅋㅋㅋ
 
이외에 본인 휴무 중에도 더 나은 결제조건을 제안해 주셨고, 그보다 더 압권은 자기한테 인테리어 사장님을 연결해주면 된다고 하심... 그러니까 중간에 치수를 재서 가구를 짜고 배치를 하는 공정이 있는데 그때 가전 치수를 본인이 전달해 주겠다는 거임. 내가 알기로도 바로 이 부분에서 전달사고가 많이 나는데 사실 고객으로서는 직접 하기가 좀 어려운 부분이기도 함. 그런데 판매 매니저 입장에서 이 업무는 자기 책임범위를 완전히 넘어선 부분임. 고객이 인테리어 업자와 알아서 해야 하는 내용이란 말임. 근데 그 커뮤니케이션까지 본인이 대신해주신다고 하니 남달라도 너무나 남달라보였음. 계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번거로워 하는 것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 역시 돈을 벌게 되어 있다는 시장의 진리를 체감함. 이 분처럼 하면 뭘 해도 성공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듦. 성공하지 않으면 이상하다.
 
너무 신기해서 또 물어보았다.
이렇게까지 (잘, 열심히) 하시는 동력이 혹시 무엇일까요? 저는 일할 때 많이 해이해진 것 같은데 정말 자극이 되네요. 감사합니다. 
 
이 앞의 모든 판매 매니저 분들도 이미 내 선택에 많은 도움을 주셨고 좋은 조건을 제시해 주셨어서 그 분들과 계약해도 아무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니까 네 분 매니저가 모두 각자 밸류애드를 해서 내게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주심. 계약은 한 사람과만 할 수밖에 없으니 그 과정에 기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무언가를 해드릴 수가 없어 아쉬운 생각이 듦. 나중에 노트북이나 모니터 같은 거 사게 되면 따로 찾아가야겠음. 하여튼 가전 졸업 자체가 굉장히 뿌듯하고 후련하기도 하면서 또 자신의 직업전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프로들에게 좋은 서비스를 받은 것이 느슨한 한국힙합에도 너무나 자극이 되었음.
 
이외에도 가전을 계약한 날 많은 감정을 경험함. 그날 잠이 왠지 잘 오지 않았음. 연짱 10일 가까이를 논 후의 출근 전야이기도 했지만 아 이제 내가 이렇게 무거운 재산 목록을 갖게 되었구나, 내려앉는구나 싶었음... 잠이 얼핏 들려다가 몸서리가 쳐지면서 일어났던 것 같음...
 
이제 정말 집이 생기고 가전이 생기고 곧 인테리어 계약도 해야 되고... 그걸 계약하고 나면 이제 난 정말 이사해야겠지... 그러면 난 당분간 붙박이게 되겠지... 한 달이라도 대출 납부를 쉴 수가 없다 즉 일을 때려칠 수 없다 ㅋㅋㅋ
 
물론 3평짜리 단칸방에 살 때도 매인 게 없어 언제든지 때려칠 수 있었지만 회사를 한 번도 안 때려친 것처럼... 어차피 꾸역꾸역 다니긴 할 것이다... 하지만 못 때려칠 커다란 이유 하나를 내 스스로 하나 만들어주고 만 것이다. 이사간다는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한 것인데 또 이렇게 한편으로는 짐인 것이다. 조그맣지만 내 한 몸은 충분히 눕고도 남고 7일을 가만히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이 3평짜리 방에서의 단출한 생활이 언젠가는 몹시 그리워 참을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는 상담에 오랜만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 저는 큰 별일은 없어요. 선생님을 찾아왔었던 작년과 거의 모든 게 같습니다.
근데 제가 그렇게 원하던 이사를 앞두고 가전을 사고 나니 기분이 묘해요. 좋기도 한데 비끄러매였다는 생각도 들어요.
전 언제나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잖아요. 그건 이제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새로 산 가전과 가구들은 내가 원하던 것이고 나를 편하게 해주겠지만 제 몸에 새로 매단 납덩이 같기도 해요.
전 소파와 거실이 간절히 갖고 싶었어요.
소파와 거실이 저한테 어떤 의미냐고 물으셨죠?
거실은 그냥 소파랑 테이블만 있는 곳이에요. 그거 말고 아무 것도 없어요. 그냥 쉬는 곳이죠. 넓고요.
저는 항상 자거나 일하거나 둘밖에 없는 원룸이 너무 양극단뿐이라 느꼈어요. 
그러니까 소파와 거실이 제게 의미한 것은... 결국 휴식이네요. 공간이 제 일상의 시간 배분을 보여주는 게 신기하네요.
예전에 선생님이 저더러 쉬어야 한다고 하실 때 서비스 제공자로서 으레 할 수 있는 모범 답안 같은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나 이미 충분히 쉬고 있지 않나? 나 워커홀릭은 아닌데? 다들 이 정도는 하고 살지 않나? 사람들 엄청 부지런한데. 나 게으른데? 하는 생각을 내심 했어요.
근데 다름아닌 제 자신이 사실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네요 ㅋㅋㅋㅋㅋㅋ
 
근데 그 휴식의 상징을 소유하기 위해서 나는 내 자신에게 또 다른 짐을 얹어주었네 ㅋㅋㅋㅋ
사실 그런 거 없이도 쉴 수 있는데 말이다 이번 추석 연휴때처럼 하면 되거든
내가 마음만 내면 되는 것이야
그래도 거실과 소파란 것은 내가 간절히 원하던 거니까 진짜 좋은가 아닌가 알아보기 위해 한번 가져볼 것이다
최선을 다해 이사 준비를 할 것이고 오늘은 인테리어 실측도 다녀왔고 추가 의견도 그림과 함께 정리해서 내일 예약메일로 가도록 해놓았다
이번 달 내로 계약도 끝날 거다
그 후로는 또 자재를 고르고.. 가구도 고르고.. 공사 전에 시험은 미리 다 치러 놓아야 하고.. 소품도 고르고.. 그림 걸 것도 골라보고.. 많은 할일이 남아 있다

 
 
상담에서 기존과는 달리 2시간씩이나 쓰며 이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했고 선생님이 남겨주신 화두는 아래와 같았다.
1. 회사에서 교감신경이 잔뜩 활성화되어 있는 투쟁도피 모드가 지금 '필요'한가 하고 질문해 볼 것 ('적절'한가 묻지 말고)
2. 목어깨가 굳어 경추성두통이 올 때, 그때 그 두통의 감각을 언어화하지 말고 일단 그대로 느껴볼 것
3. 내 자신의 자동화된 신체 움직임을 스스로 관찰해볼 것
이런 것도 일종의 명상인 것 같은데 생각해보지 못한 방법이다. 나는 몇 년에 한 번씩 상담을 가는 사람인데 그 다음은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부분들을 체험해보고 말씀을 들려드려야겠다. 그런데 MBTI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해도 될 거 같다고 말씀드려야겠다. 그래도 일단 말씀 주시는 것은 다 귀기울여 들었는데 내가 극강의 T라서 F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배울 필요는 있다고 했다. 맞고 틀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그 옳은 방향으로 나랑 성향이 많이 다른 사람들조차 설득하고 감화시키고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까지가 가능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것은 백번 맞는 말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게 회사 생활을 하면서 내가 부닥친 큰 과제이다.
 
 
그외에도 많지만 차마 필설로 다하기가 귀찮아 이제 식고 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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