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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오늘만 개점휴업

bravebird 2023. 12. 6. 00:04

오늘은 공부를 안해야겠다.

 

방송통신대 시험 기간은 보통 3주 정도가 되는데 이번 시험기간에는 독서실 11시간권을 끊어 12시까지 공부를 하곤 했다. 독서실 같은 폐쇄된 곳을 안 좋아하는데 공부가 밀려서 어쩔 수 없었다. "퇴근하고 나서" "12시까지" "독서실에서" "4지선다 문제를 풀고 동그라미를 치면서" 느끼는 거는 아 진짜 나이먹고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가 아무리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솔직히 나이에 맞게 그때그때 할 일이 있긴 한 것 같은데 30대 중반을 앞두고 암기하고 문제푸는 공부는 아닌 것 같다.

 

누가 등떠민 것도 아니고 수업 퀄리티도 매우 좋으며 내가 좋아서 선택한 공부임에도 근데 이거 해서 뭐함?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일 끝나고 제대로 밥먹을 틈도 없이 밤 12시까지 독서실에서 보내는 게 맞나, 이게 지금 할 경험이 맞나, 뭐 이런 생각이 자꾸 듦.

 

방송통신대 선배님들하고 한문 강독 모임을 매주 하고 있단 말임. 근데 선배님들은 적어도 50대이고 대다수가 60대 70대이심. 이 분들은 공부를 진짜 재밌게 열심히 하심. 복습하고 또 복습하며 학이시습지 불역열호를 매일 실천하고 계신단 말임. 나도 은퇴를 하고 나면 다시 공부를 '즐길 만한 것'으로 삼을 수 있을까?

 

평생 생활비 바짝 벌어놓고 은퇴하고 나서 동양사학과 대학원 가서 과정 마치는 게 소원인데 참 쉽지 않겠다 싶음. 이거 너무나 원대한 꿈이었음;; 논문을 쓰고 학위과정을 마치는 것은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20~30대에게도 너무 어려운 일임. 내가 대단한 학문적 성취를 하겠다는 것이 전혀 아님. 그저 나이들어 늘어지지 않고 좋아하던 것을 쭉 배우고 단련하고 싶은 그런 마음인 건데 실은 몹시 어려운 일인 듯함. 그때 되면 의지나 동기의 차원을 떠나서 피지컬 이슈가 있을 것 같음. 머리가 돌아가고 오랫동안 뭔가를 노력하고 추구할 수 있고 한 것도 다 피지컬임.

 

아 여기서 잠깐. 내가 피지컬 때문에 지금 공부하는구나. 일단 글 쓰면서 깨달았음.

 

그리고 공부 말고 다른 뾰족한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님. 퇴근하고 나면 사실 한가함. 유튜브 보거나 블로그에 똥글 쓰는 것보다는 그래도 일본어 배우고 한문 배워서 나중에 여행이라도 갔을 때 하나라도 감흥이 더 있는 게 나음. 이것도 지금 글 쓰면서 깨달았음.

 

또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학업 성취든 직업적 성공이든 돈벌이이든 가족을 키워내는 것이든 여하간 모든 열매는 지극히 달콤해보이지만 그 열매가 커지기까지 대부분의 과정은 그저 혼자서 지루하고 단조롭게 고군분투하는 순간들인 듯함. 이건 일이나 공부처럼 원래 재미없는 그런 것들뿐 아니라 취미조차도 그러함.

 

올해 여름에 출장 등등 해외에 나갈 일이 많아 너무 바빠져서 취미도 접었음. 원래 주말에 활도 쏘고 승마 동호회도 나가고 그랬었음. 그런데 바빠지고서 곰곰 생각해보니 난 말타고 활쏘기를 이미 잘해서 간지가 나는 그런 상태를 동경하는 거였음. 아직 잘하지를 못해서 너무 지리멸렬한 상태, 그러니까 매일매일 노력하며 천천히 성장해야 하는 과정 그 자체는 충분히 즐기지 못하고 있었음. 평일에 시달리다가 주말에 시간 맞춰 일어나서 멀리 나가 땀흘리는 것이 노동처럼 느껴졌음. 근데 뭐든 잘하기 위해서는 노동을 해야 되는 게 사실임. 그래서 그걸 감수할 만큼 여유가 생길 때까지 그냥 쉬기로 했음.

 

과정이란 게 다 지리멸렬하고 지겨운 반복이고 수고롭고 고독하다. 그리고 끝도 없다. 공부를 이룬다는 것에는 끝이 없고 일을 잘한다는 것에도 완성지점은 없으며 활을 잘 쏜다는 상태도 최종 도달점은 없고 그냥 계속 식스시그마를 향해가는 영원한 과정일 뿐. 그냥 원래 그런 거니까 그런 줄 알아야 함.

 

내가 일본어를 대체 왜 해야 될까? 한문은 왜 해야 되고? 이걸 왜 해야 되는지는 아직도 잘 모름. 이거를 모르는 상태보다는 그래도 공부해서 알게 된 상태가 더 넓은 세상이거든. 이왕 태어나서 사는 김에 더 많은 것을 누렸다고 할 수 있는 거거든. 그거 한 가지다. 그래서 그냥 하는 거야 그냥. 그 이외에 이유가 없고 목적도 없다.

 

내일이랑 모레는 공부할 수도 없는데 오늘 그냥 자면 좀 양심 없으니까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라도 보고 자야겠다. 아 그래도 이런 수고를 택한 바람에 그래도 죽어 없어지기 전에 이런 멋진 걸 원문으로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夫天地者는 萬物之逆旅요 光陰者는 百代之過客이라.

부천지자 만물지역려 광음자 백대지과객

무릇 천지는 만물의 여관이요, 세월은 영원한 나그네이다.

 

而浮生이 若夢하니 爲歡이 幾何오.

이부생 약몽 위환 기하

그러나 덧없는 인생은 꿈과 같으니 즐거움을 누린들 얼마나 되겠는가.

 

古人秉燭夜遊는 良有以也로다.

고인병촉야유 량유이야

옛 사람이 촛불을 잡고 밤놀이를 한 것은 진실로 까닭이 있도다.

 

況陽春이 召我以煙景하고 大塊가 假我以文章이라.

황양춘 소아이연경 대괴 가아이문장

하물며 따뜻한 봄날은 안개 낀 경치로써 나를 부르고, 대지는 나에게 문장을 빌려주었음에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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