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It is not very important after all 본문

일상

It is not very important after all

bravebird 2024. 1. 4. 23:18

 

 

크리스마스나 새해가 되면 여행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인사를 합니다.

미주알고주알 일상을 나눌 수 있는 존재들은 아니기에 특별한 날을 계기로 간만에 인사를 나누는 것입니다.

 

작년 초 마하라슈트라에 갔을 때 로나발라의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몸살이 났었던 이 호스텔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 저녁 한나절을 몹시 즐겁게 보냈습니다.

이 친구 렌트를 얻어타고 로나발라에서 고속도로를 달려 뭄바이로 돌아왔었죠.

그때 같이 차를 타고 왔던 다른 친구는 뭄바이에서 자기 친구와 가족들에게도 나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 그냥 사람 대 사람이고 자연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들과 경제적인 거래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직장에서와는 달리 어떤 사용 가치를 증명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앞에 아무 타이틀도 붙지 않은 내 이름과 몸뚱이로만 존재하기 때문에 마음에 짐이 없어요.

그래서 자잘한 눈치보기를 생략해 버리고 밑도끝도 없는 질문을 던지기도 합니다.

 

전 일을 즐길 수 있는 비결이 뭐냐고 물었어요. 이 친구는 자기 일이 무척 재미있다고 했었거든요.

사실 무슨 일인지는 잊었습니다. 그때 당시 설명을 들으면서도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했어요.

그저 자기 일이 재밌다는 사람 자체가 희귀한 존재인지라 인상 깊었기에 물어봤어요. 

 

친구는 며칠 지나 대답을 해줬습니다.

그저 세상 자체가 모순덩어리이며 이 거대한 설계 속에서 우리의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다고,

그렇기에 현재 주어진 것에 100% 충실하면 된다고 합니다.

 

이 말에는 적잖이 와닿는 것이 있었어요.

아직 애송이여서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요즘 부쩍 자주 합니다. 

저는 생업에 대해 내내 불만인 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직업이 뭐였는지는 내 인생 전체에서 사실 크게 중요치 않을 겁니다.

심지어는 누굴 사랑했는지, 누구와 함께 살았는지도 실은 어떤 의미에서 마찬가지일 거라고 봐요.

친구는 cotraveller가 가장 중요하다고 했지만 저는 그것조차도 사실 목적은 아니라고 봐요.

직업이 무엇이든 동반자가 누구이든 관계없이 이미 벌어져 있는 내 생명을 통한 경험 그 자체가 가장 중요한 것이에요.

내가 똥지게를 멨든 커다란 사업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든 그림을 그렸든 나라의 녹을 받았든

결국에는 내 목구멍을 책임질 수 있고, 너무 늘어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적당한 몰입으로 채울 수 있으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가치를 교환하며 생존하는 법을 배우고 내가 받는 대가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또 만약 가족을 만들었을 경우 내 생업으로써 그들에게 소임을 다할 수 있다면 

그래서 내 생명의 지경을 넓히고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것이고 따라서 직업이 뭐였든 결국 괜찮다고 봐요.

마찬가지 의미에서 내가 홍길동을 사랑했든 김철수 김영희를 사랑했든 아니면 그냥 나 자신을 사랑하든

내 자식이 공부를 잘하는 자식이었든 춤을 잘 추는 자식이었든 결국에는 큰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 누구였든 간에 나는 어차피 그들을 사랑할 거고 그들과 함께 내 세상은 확장될 것이고 그게 중요한 거죠.

그렇다고 놈팽이를 만나도 된다는 뜻이냐? 범죄를 해도 된다는 뜻이냐? 자식이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뜻이냐? 그런 극단적인 의미가 아니고요.

운명적인 단 1개의 정답을 찾느라 시간 허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에요.

내가 선택한 것, 혹은 관점에 따라서는 나에게 주어진 것,

바로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 나가겠다는 결심과 매일 반복되는 노오오오력! 하품마저 나는 당연한 말이지만 아마 이것 뿐일 듯 합니다 산다는 건.

근데 이 얘기는 예전에도 많이 했었네요. 스토아 사상이라든지. 영웅은 결과가 아닌 행동으로 평가받았다는 나심 탈렙의 말이라든지.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고 한 생각이라든지.

 

인생을 다 살아보지 않아서 단언할 자격이 모자랄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그럴 거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다 살고 나서 죽을 때가 되어서

아! 내가 대통령이 되었어야 하는데!

아! 내가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어야 하는데!

아! 내 자식이 공부를 잘했어야 하는데! 뭐 이런 후회를 하지는 않을 것 같단 말이에요 ㅋㅋㅋ

아! 내가 배관공이든 음악가이든 회계사든 아무래도 상관 없었어, 근데 조금 더 열심히는 해볼걸

아! 잘 되지 않았더라도 상관 없어, 그래도 한번 좋아한다고 말이라도 해볼걸

아! 참 많이도 싸웠지, 그래도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해줄걸, 뭐 이런 후회를 할 것 같은데요 진짜 100%

 

백세인생의 3분의 1쯤 살고 돌아보니 제 생업이나 주변 사람들이나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등 많은 것들은 뜬금없이 결정되었습니다. 꼭 그것이어야만 했던 하등의 필연적인 이유가 전혀 없어요.

정말 생각도 못한 계기로 어쩌다가 시작이 되어서 진행이 되어버리고 어느 새 꽤 멀리 와있는 걸 발견해요.

그러니까 인생은 곧 내 자유의지 100%의 표상은 아닌 것 같아요. 뭔가 약간은 정해진 것이 있다고 봐요.

그걸 우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운명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원인과 결과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연으로든 운명으로든 인과법칙으로든 '어느 정도 결정된 일'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결정된 것들을 내 방식대로, 어떤 직업으로든, 어떤 동반자와 함께든,

그저 되는 한껏 살아 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곧 미래 또다른 것의 원인이 되어 새로운 지경을 펼쳐 내겠죠.

주어진 줄로만 알았던 것들로부터 무언가를 새로 만들어낼 수 있는 자유 역시 여전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는 아마 연기설이나 영혼 같은 것에 대해 약간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전혀 하지 않던 생각이었죠. 계기가 뭐였을까요?

일단은 몇 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일을 10년쯤 해보니 내가 사회에서 이룰 수 있는 성취에도 조금씩 한계가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언가를 성취할 때 느끼는 한계효용 자체도 줄어들었지요. 나이들어감에 따른 자연스런 수순입니다. 

홀로 서기 위해 보살핌과 교육을 받는 시기를 보낸 다음

사회에 던져져서 견디고 성취하며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 시절을 한참 지나는 중

조금씩 한계를 경험하게 되면서 그 다음은 무엇인지가 드디어 궁금해진 듯 합니다.

 

밤이 깊었고 기상시간은 정해져 있습니다.

뜬구름잡는 소릴 한참 늘어놓았지만 사실 내일 일할 생각에 여전히 몸서리가 쳐지는 중생입니다.

다만 이것 역시 나중엔 까마득히 지나간 일이 될 것이고 인생 전체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으리란 건 자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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