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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하면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bravebird 2023. 11. 17.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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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8시 출근 23시 퇴근 24시 집도착;; 그건 둘째치고 일 내용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나 의욕이 없고 수동적인 자세라 요즘 하는 일이 정말 발퀄인 것 같다. 매너리즘 쩐다. 만사 귀찮다. 묻는 말에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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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몇 년 전에 쓴 적이 있다. 평생 학생으로 살다가 회사생활을 하게 된지 2년차에 남긴 내용이다. 저건 지금 읽어봐도 바뀐 생각이 하나도 없다.
 
이처럼 어떤 경험은 너무나 크리티컬한 것이어서 그걸 겪기 전 상태로는 절대 돌아갈 수 없도록 사람을 바꿔 놓는다. 학생이었다가 직업인이 된 것도 그런 경험이었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크리티컬했던 것은 투자를 시작한 것이었다. 그래서 투자하면서 배운 것이 무엇인지도 남겨 본다. 결국 딱 한 가지로 요약이 가능하다. "100만원은 100만원이 아니다." 라는 사실.

 
모든 것은 한 순간도 쉬지 않고 계속 변하고 있다.
만물의 가치는 고정값이 아니라 계속 변화하는 범위로 존재한다.
 
통장에 지금 100만원이 찍혀있다고 치자. 근데 그 가치는 사실 단 1초도 쉬지 않고 계속 영원히 변한다. 그걸 주식을 하면서 비로소 체감을 했다. 아, 주식창이 빨간색이면 상대적으로 현금은 녹아 내리고 있는 거구나... 주식이 폭락하면 현금이 이렇게 절실하구나... 차트로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현금도 매 순간 가치가 변하고 있군.

게다가 요즘 물가는 앙등 중이다. 환율은 변한다. 금리도 변동하고 그러면 채권가격도 달라진다. 부동산과 금과 주식과 코인 등의 다양한 자산은 그 가치의 변화를 아예 차트로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돈으로 바꿔 가질 수 있는 모든 서비스나 재화나 경험도 가치가 계속 달라진다. 이건 단순히 액면가가 인플레나 디플레 때문에 오르고 내리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그 재화나 서비스가 순간순간 가지는 내재적인 가치 자체가 상황마다 사람마다 매번 달라진다. 예컨대 나는 일반 끼니로는 라면이 아무리 맛있고 저렴해도 먹지 않는다. 반면 미국 출장 중 느끼한 음식에 질릴 때는 훨씬 비싼 돈을 주고도 기꺼이 사먹는다. 즉 재화나 서비스나 자산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서의 교환을 전제로 하므로 그 가치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이며 따라서 가치라는 것은 임의로 고정시키거나 통제할 수가 없다. (이걸 체감한 후에 자본주의, 자유주의 성향이 예전보다 짙어져서 정치성향이 기존보다 보수화 되었다.)



 
투자를 하지 않을 때는 아무 것도 안하고 통장에 돈을 넣어두면 최소한 잃지는 않는 거라고 착각했었다. 주식이나 코인과는 다르게 현금 가격의 변화는 차트로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전에 경제학 개론 정도는 배워본 적이 있어서 인플레이션이라든지 디플레이션이라든지 금리라든지 환율에 대해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변화를 실시간 차트로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무언가에 투자를 해보기 전에는 가치의 가변성과 상대성을 크게 실감하지 못했다.
 
최근 로봇청소기를 100만원 넘게 주고 샀다. 쓸기 닦기와 걸레 청소에 건조에 자동 급수까지 해줘서 거의 손댈 것이 없는 모델이다. 예전 같았으면 청소가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냥 직접 쓸고닦으면 되지 청소기에 어떻게 100만원을 넘게 쓰냐고 낭비 아니냐고 생각했다. 이사도 예전 같았으면 짐도 별로 없으니 박스를 직접 다 싸서 가족을 불러다가 몇 번을 오가면서 했을 것 같다. 이제는 그냥 잃어버리기 쉬운 작은 물건들만 미리 박싱해놓고 포장 이사를 부를 예정이다. 적정한 돈을 써서 그 이상의 체력과 시간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사실이 명확하기에 단순 지출이 아니라 안 하면 손해인 교환이다.



 
혹시 돈 좀 벌어서 그런 거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아니다. 잃기도 많이 잃었고 대단히 크게 번 것 없다. 현금 포함 세상 만물의 가치가 고정값이 아님을 깨달은 마당에 교환이란 것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 것이다. 100만원은 고정된 100만원이 아니다. 100만원으로 바꿀 수 있는 다른 여러 옵션과의 상대적인 관계 속에서 가능성의 범위로 존재한다. 어차피 가만 놔둬도 실은 변하는 것이기에 그때그때 가장 좋은 교환을 하기 위해 알아보고 실행하고 그 결과는 운에 맡기면 되는 것이다. 이걸 20년이 지나 100배 이상 오를 것 같은 주식으로 바꾸는 것도 좋은 투자이지만, 로봇청소기로 교환해서 100만원 이상의 이득을 얻으면 이 역시 성공적인 투자이고, 아니면 인간의 행복을 위해 국경없는 의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아주 좋은 투자이며, 혹시 모를 디플레이션을 위해 현금을 가지고 있기로 결정하는 것도 지당한 투자이다.
 
계속 변화하며 레인지로 널뛰는 세상 만물의 가치를 고정시키기는커녕 예측하거나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가장 엄연하고 확실하고 중요한 것은 결국 내 자신의 몸뚱이이고 그 몸뚱이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이다. 건강을 지키고, 떳떳하게 살고, 꾸준히 벌고, 잘 놀고 잘 먹고, 똥도 잘 싸고, 잠도 잘 자고, 하고 싶은 공부도 해보고, 하고 싶으면 여행도 많이 다녀보고, 그러기 싫으면 안 하고, 사람도 만나 보고, 싫으면 말고 하면서 내 인생의 스팬과 차원을 늘려 가능성을 누려 보는 것이 제일 확실한 투자다.
 
난 예전이나 지금이나 하는 일이 성에 차지 않고 항상 불만이 많다. 2016년쯤까지만 해도 다시 공부해서 직업을 바꿔서 어떻게 좀 해보고... 외국으로 나가서 어떻게 하고... 이직을 해서 뭘 어째보고... 뭐 이런 궁리를 했었다. 그런데 투자를 시작한 후에는 그냥 한 몸 살아있으면서 하루하루를 마음에 들게 채워가는 쪽으로 노력 방향이 바뀌었다. 건강하게 살며 떳떳하게 번 돈을 가지고 그때그때 합리적인 교환을 하면서 하루하루 쌓아 올려가면 큰 실패를 하려야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혹 실패를 경험하더라도 어쨌든 살아만 있으면 상황이 변화하면서 기회가 다시 올 것 같다.
 
몇 년 전에 암스테르담에 놀러가기 전에 읽은 책에서 마음에 든 부분이 있는데 투자자라는 정체성이 추가된 후의 내 마음 상태를 잘 요약해 준다. 한 몸 잘 살아있고 절제하며 좋은 선택을 쌓아가는 데 하루하루 힘쓴다면 내가 뭘 하건 간에 혼자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민이라고 느낀다.
 
해질 무렵 딸 애나의 방이었던 다락방의 조그만 창으로 바깥을 내다보면, 꼭 내가 17세기 후반 암스테르담의 평범한 시민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별로 중요한 인물은 못 될지 모르나 자신이 행운아라고 느끼고 그 상태에 만족하는 사람, 노력하면 혼자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는 사람, 따뜻하게 부른 배와 조금 전에 마신 맥주 한 잔에 기분 좋게 취한 머리로 세계를 나에게 배달해준 집 앞 운하의 수면에서 반짝거리는 얀 판 데르 헤이던의 가로등 불빛을 바라보며 행복해할 줄 아는 암스테르담의 시민 말이다. 
 
여하간 직장 생활 너무 그지 같아서 투자로 돈을 벌어보려다가 인생무상을 절감하고는 내 몸뚱이라든가 하루하루 존재한다는 것 그 자체, 절제와 건강 같은 것에 대해 의미를 두게 되었다. 결국 투자란 본질적으로는 불확실성 속에서 선택을 해 나가는 것인데 그냥 산다는 것 자체가 선택의 연속인 듯 하다. 이제 이닦고 운동하러 가야겠다. 아 근데 내 이 진짜 개복치임. 유전적으로 충치가 잘 생기는 것 같은데 나의 장수에 있어 가장 큰 복병이 현재 충치이다.
 
투자니 주식이니 하는 단어가 많이 들어가 있는 이 글을 남기면 AI 봇들이 몰려와서 패시브 인컴이니 뭐니 어쩌고 저쩌고 지랄 발광을 하는 스팸 댓글을 많이 달 것 같아 벌써부터 개열받지만 오랜만에 글을 한번 남겨본다.
 
결론 : 모든 게 전부 다 변함. 통제 불가능. 건강을 위해 노력하는 게 최고의 투자. 살아있으면 장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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