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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유럽

카지노 슬롯머신 체험기

bravebird 2024. 1. 28. 01:21

 
 
2022년에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출장을 갔었는데 개인 일정을 가질 수 있어서 그라나다를 찍고 나서 마드리드에서 며칠 놀았다. 숙소는 도시 중심가의 이동이 편한 동네에 잡았는데 바로 근처 큰길가에 흥미롭게도 카지노가 있었다. 이름은 그랑 비아 카지노였다.
 
그전까지 카지노를 생전 가본 적이 없었으나 언젠가 꼭 한번 가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강원랜드까지 가기는 너무 번거로워서 미루고 있던 차에 숙소에서 몇 분 걸리지도 않는 도보 거리에 있는 카지노는 놓칠 수 없었다.
 
하지만 할 줄 아는 게임이 없는 상황이었다. 텍사스 홀덤을 칠 줄도 모르고 블랙잭을 할 줄도 모르고 다른 건 뭐가 있는지 잘 모른다. 그리고 나는 룰을 배우는 게 언제나 늦은 사람이라 현장에서 딜러의 설명을 듣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워서 하고 싶은 마음까지는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돈 넣고 당기기만 하면 되는 슬롯머신만 해보고 내부를 구경하고 오기로 했다. 카지노의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하는 바로 그 슬롯머신.
 

 
이미 2년 전의 일이라 판돈을 얼마나 준비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구글 포토를 찾아보니 사진을 찍어놓은 게 있었다. 카지노 내부의 ATM에서 20유로 즉 3만원 정도를 출금했는데 수수료만 5유로여서 기함하였다. 한 10만원 정도는 쓸 용의가 있었는데 한 번 당길 때 얼마 소진되는지, 소진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일단 3만원 정도로 가볍게 시작하고 상황을 봐서 추가 출금하려고 20유로 뽑았는데 수수료만 5유로인 걸 보고 추가 출금은 결국 하지 않았다.
 
이날 나의 목표는 아래 네 가지 정도였다.
1. 슬롯머신만 하고 다른 건 구경한다.
2. 판돈은 무조건 다 소진하고 추가 출금은 하지 않는다.
3. 딴 돈에 대해서는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관찰해 본다. (계속 당기는가 인출하는가)
4. 대체 사람들이 이것을 왜 하는지 무슨 재미인지 한번 생각해 본다.
 
목표를 이렇게 잡은 이유는 슬롯머신에서 플레이어가 컨트롤 가능한 요소란 1. 판돈의 규모 2. 행동(당기기)의 지속 여부 뿐이기 때문이다. 슬롯머신은 순전히 운빨 게임이다. 그러나 여느 다른 도박과 다름없이 시행을 반복할수록 카지노에 유리하게 되어 있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이런 게임을 하면서 돈을 얼만큼 벌어 나오겠다는 것은 '공상'은 될 수 있으나 '목표'는 될 수 없다.
 
기계에 일단 10유로를 넣고 당기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그냥 단순히 당기기만 하는 것인데 멈출 수가 없었다. 한 번 당길 때 얼마나 차감되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0.25유로였던 것 같다. 소소한 금액의 당첨은 자주 있어서 게임 시간은 꽤 쏠쏠하게 늘어났다. 한 번인가는 잔액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레버를 당겼더니 판돈이 몇 배로 뻥튀기되는 행운에 당첨되었다. '개같이 부활'이었다. 이 흥분 속에서 돈을 뽑아서 털고 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돈이 다 녹을 때까지 게임을 계속했다.
 
20유로를 한 번 녹이고 나니 ATM에서 한번 더 뽑아올까 하는 유혹을 느끼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한 경험이다 싶었고 인출 수수료 5유로가 강력한 억제기가 되어주었다. 이후로는 그냥 카지노 전체를 둘러보면서 2층으로 올라가 룰렛과 포커를 구경하다가 칵테일 한 잔 하고 나왔다. 룰렛은 딱히 복잡할 것은 없으니 한번 해볼 수도 있었겠는데 그땐 밤이 깊어가고 있어서 조금 번거로웠던 것 같다. 어쨌든 카지노는 듣던 대로 시간의 흐름을 알 수 없도록 창문 같은 게 없었고, 바닥에는 융이 깔려 있었으며, 약간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아늑한 노란 조명이 사용되고 있었다. 안에서 어떤 사진 촬영도 할 수 없었다.
 
카지노를 다녀와서 한동안 생각을 해보았다. 그냥 당길 뿐인 게임이 대체 무슨 재미인가, 근데 나도 왜 계속 당겼나 하는 것들. 슬롯머신에서 돈을 따면 정말 기뻤다. 특히 다 끝나가는 게임에서 돈을 따면 진짜 예수 재림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기쁨을 인수분해 해보자면 정확히는 '돈을 벌어서'였다기보다는 '게임을 계속할 수 있어서' 쪽에 가까웠다 내겐. 그러니까 내가 슬롯머신에서 느낀 쾌락의 요체는 '계속(continuation)'이다. 그냥 별 거 없고 이걸 단순히 계속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슬롯머신은 결국 살아간다는 것을 단순하게 게임화해놓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의 제1본능은 생존의 지속이다. 생명체는 생존을 지속하면서 어떤 행동을 하고 그 결과를 계속 경험해 나간다. 실제 세상에서는 그 행동과 결과가 무수히 여러 가지이지만 슬롯머신에서의 행동은 '당기거나 더 이상 당기지 않는 것', 결과는 '돈을 따거나 잃는 것'으로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냥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재밌는 그런 게임이었다 슬롯머신은.
 
예컨대 갖은 노력과 용기를 통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차지하는 보상을 얻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기서 굿 게임! 하면서 삶 자체를 그만둘 수 있는가?
사업체를 성공시키겠다는 필생의 목표가 있어서 많은 것을 걸고 마침내 그것을 실현해 냈다. 그렇다고 해서 아 내 인생은 이거면 족하다 하고 쿨하게 인생을 시마이 칠 수 있는가?
징기스칸의 몽골 제국은 아시아의 귀퉁이부터 시작해서 유럽 한복판까지 정복해 나가며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칸이 아 이만하면 충분히 크다, 이만하면 죽어도 좋다 하고 삶을 하직할 수가 있겠는가?
 
아니다 인간은 더 원한다. 계속 살아가기 원한다. 슬롯머신은 그런 인간 본능을 영리하게 활용하는 도박이다. 안 해보았지만 다른 도박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슬롯머신처럼 단순 운빨뿐 아니라 기량이라는 팩터까지 더해지는 텍사스 홀덤 같은 게임에는 '나의 기량으로 승리를 거두고 게임을 계속해 나가며 돈을 딴다'라는 일종의 환상이 주는 희열이 추가될 것이다. 하여튼 도박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었고 중독성이 있는 것은 결국 게임들이란 인간의 생존 본능과 행동 본능을 훌륭하게 함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돈은 그 게임에 활기를 더하고 운명적인 느낌을 드리워 주기 위한 수단일 뿐 사실 게임의 목적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정확히는 돈이 목적이 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딸지, 딸지 말지가 아예 운의 소관인데 어떻게 따는 것을 목표로 하는가. 그리고 따면 계속하고 싶은데 어떻게 벌어 나오겠는가. 카지노에서 돈은 게임을 위해 불살라 버리기로 준비한 연료로 봐야 한다. 그러다가 운 좋게 돈을 따면 생명 연장의 꿈이 이루어져 좋은 것이고. 이렇게 생각해야 적당히 즐겁게 놀다가 연료가 소진됐을 때 떠날 수 있다.
 
한번쯤은 판돈을 엄격히 정해놓고 카지노 체험을 해보는 것도 충분히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걸 수 있는지, 판돈의 추가 투입을 자제 또는 적극 고려할 수 있는지, 적합한 게임과 전장을 고를 수 있는지, 잃거나 땄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지 관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 모든 것은 가깝게는 우리가 하는 각종 투자 행동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과 유사하며, 좀 더 멀리는... 그냥 살아가면서 하는 모든 선택의 문제를 함축한 것이다. 나는 운빨에 기량의 요소가 추가되는 블랙잭이나 홀덤을 할 줄 아는 상태에서 언젠가 한번 더 가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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