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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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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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vebird 2024. 2. 3. 02:48

최근 인생의 최대 위기이자 뜻밖의 기회라고 할 수 있는 극적인 일을 겪었다. 난 정리해고를 당했다.

몇 달 전부터 이 쳇바퀴에서 반드시 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차마 밥줄을 내 손으로는 끊을 수가 없었는데 외부 상황에 의해 드디어 놓게 된 것이다. 짐은 이미 싸두었고 컴퓨터도 드라이브도 진작에 정리해 두었기에 나오는 데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고 아무런 미련도 후회도 남아있지가 않다. 가슴속을 덩쿨처럼 옭아매고 있던 모든 괴로운 기억이 빠르게 흩어지는 것을 느낀다.

그간 가파른 비탈길을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전거로 내려오는 꿈이나, 발디딜 곳이 전혀 없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꿈이나, 두꺼비가 비좁은 주머니를 튀어나오는 꿈 같은 걸 꾸어 왔을 정도로 떠날 때가 된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이 회사에서 I overstayed my welcome 이 상태였다. 연봉이 레인지의 상단에 도달했었고 몇 년간 실망한 것이 많아 심히 불만족해 있는 것을 숨기지 못하면서 어떤 돌파구를 찾지는 못한 채 이미 익숙해진 일을 반복하는 와중에 동료의 수는 자꾸 늘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통보를 받았을 때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일을 전혀 예상 못했다는 것이 신기했다. 내가 직접 해야 했지만 차마 단행하지 못하던 것이 불가항력적 상황에 의해 이루어져서 위로금도 좀 받으며 드디어 쉴 수 있다는 안도감이 오히려 들었다.

작년 말, 지극히 답답한 마음에 몇 년에 한 번 정도 가는 상담을 가보았다. 선생님은 내가 지나치게 열심히 달려왔다며 그냥 아무 거나 떠오르는 것을 바로 할 수 있는 상태, 그 떠오른 것을 바로 폐기해 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상태에 충분히 머무를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난 과연 다음 할 것을 정해놓고 달리는 삶만 살았었고, 내 목구멍만은 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책임져야만 인생의 나머지 요소(결혼 여부 등등등)들을 옵션으로 두고 내 뜻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고집이 강했기에 학생 때부터 돈벌이를 놓지 못했다. 지금 불가항력적으로 백수가 되고서야 계획 없이 쉰다는 게 뭔지 처음 경험 중이다. 정말 내일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들어야 하는 수업도 나가야만 하는 약속도 해치워야 할 업무도 아무 것도 없다. 3일 후에 지구 반대편에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며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고 그냥 하루종일 잠만 자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날그날 하고 싶은 대로 지낸다.

작년에 도저히 갑갑함을 버티지 못하겠어서 미래를 물으러 간 적도 있는데 2024년은 여러 모로 쉽지 않을 것이나 2025년부터는 다른 환경이 펼쳐지니 준비하는 한 해로 삼으라는 말을 들었다. 어떻게 달라진다는 것인지는 잘 모른다. 다만 돈 또는 자기 자신의 사업 같은 것에 대한 생각이 매우 강해질 것이라고 했다. 돈에 대한 생각은 언제나 강했고 뭐 어차피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인데다 나는 배운 것이 직장생활 뿐인지라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건 없겠지만 만에 하나 2025년에 다른 환경이 펼쳐진다면 무조건 환영이고 좀 그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 가려면 추진력을 얻어야 하므로 지금은 좀 마음 가는 대로 쉴 테다. 오히려 지금은 내 미래를 물으러 가고 싶은 마음도, 상담하러 갈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그돈 씨, 주식 사야 돼.

시간이 넉넉하게 생기면 직장 다니면서는 못 가는 인도 같은 데로 장기 여행을 가고 싶을 줄 알았다. 근데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 현재 여행은 "이렇게 된 김에 해야 하는데" 하는 약간 의무적인 것에 가깝다. 막상 여행을 가면 당연히 즐거워 하겠지만 당장은 그것보다는 지난 10여년의 피땀 눈물로 이룬 내 집에서 그냥 평범한 하루하루를 소요하고 싶은 것 같다. 오래 기다리던 집에 입주를 하자마자 이렇게 되었기 때문이다. 알람 없이 그냥 햇빛을 받고 일어나서 청소기 돌리고 밥 먹고 책 좀 보다가 운동하고 잠드는 것이 좋다. 당분간 계획 없이 좀 쉬긴 하겠으나 현재 내 분명한 구심점은 집이다. 이 집에서 이뤄지는 일상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집이라는 자산뿐 아니라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일상 자체를 오랜 시간 동안 만들어 왔으므로 그냥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스스로 이룬 것은 언제나 참 좋다. 나는 자수성가맨이라 내 돈에 대해서 애착이 진짜 강하다. 관성적으로 구직사이트를 틈틈이 들여다 봤지만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이 없다. 그러나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지금과 같이, 걸릴 그물이 없는 바람과 같이 조용히 한가롭게 지낼 수 있는 날을 최대한 앞당기고 싶다는 열망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다. 그렇게나 쉬고 싶어했음에도 결국 돈에 대한 마음이, 정확히는 자유에 대한 마음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조만간 또 일자리를 찾게 될 것 같다. 모처럼 생긴 목돈을 까먹고 싶지 않고, 신용대출을 갚고 싶지 않고, 매달 들어오는 현금흐름을 갖고 안정적인 투자를 해서 자산을 더 늘리고 싶다. 그 다음 하루빨리 목구멍 포도청에 사표를 내고 그저 유유히 존재하고 싶다. 결국 아마 곧 일을 또 하겠지만 그래도 좀 충분히 쉬며 시야를 넓혀서 이것저것 탐색도 해본 다음 가장 좋은 타이밍에 적합한 일을 찾게 되는 행운이 약간 따랐으면 한다. 그리고 조직생활을 다시 하게 된다면 인사이트 좋은 친구가 조언해준 대로 직장 간판보다 보스를 잘 볼 것이다. 내가 충성할 수 있고 나에게 의미있는 일을 줄 수 있고 나의 공을 지켜줄 수 있는 강하고 유능한 보스를 찾아야겠다.

직장인으로 보낸 지난 10여년은 고만고만한 내 그릇과 쉬이 만족하지 못하는 성깔로는 그다지 쉽지 않았다. 거저 주어진 것은 없었으며 뭐든 맨손으로 얻어야 했고 대부분 순간 지극히 고독하였다. 대단하게 뛰어난 재능이 없고 큰 돈을 번 것도 아니며 10년 넘게 노력해서 겨우 남긴 집 한 채도 내 마음엔 꼭 들지만 객관적으로 그냥그냥 평범하다. 그래도 나는 원하는 것들은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남에게 의탁하지 않고 스스로에게 마련해줄 수가 있었다. 바라는 것이 그리 거창하지가 않고 대부분 자력으로 실현할 수 있는 점에 감사하며 자부심을 느끼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겠다.

이제 나는 보호받고 교육받는 시기는 끝났고 본격적으로 장년에 접어들었다. 앞으로는 해결하고 책임져야 할 일들은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예전보다도 더더욱 오직 스스로만을 등불삼아 앞을 모르는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도 거의 그랬기 때문에 별다를 것도 없거니와 매를 유난히 일찍 맞은 오늘날의 경험으로 다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몇몇에게 백수 커밍아웃을 하면서 혹시 내가 돈 빌려달라고 하면 차단하라는 농담을 했다. 이건 셀프 디스 농담이지만 한편으로 진심이다. 돈 빌려달라고 하면 즉각 차단을 해야 된다. 농담임에도 선뜻 빌려주겠다고 해준 친구들과 동생이 너무나도 고맙다. 그러나 결국 삶은 혼자 헤쳐나가는 것이며 돈도 조력도 조언도 답도 힘도 희망도 지혜도 구원도 용서도 자비도 평안도 자유도 전부 내 안에서 구해야 한다는 점 기억하며 잘 살아 보겠다.

아 그리고 며칠 전에 친구가 어이 백수! 하고 날 불렀는데 그게 너무나 웃겨서 정말 한참을 웃고는 어이 노예! 했다. 진짜 아무렇지 않게 백수라고 불러주고 평소랑 아무 다를 바가 없이 유쾌하게 대해줘서 참 좋았다. I've got some news. I am laid off, which means I am unleashed. Let's celebrate. 자 그럼 만국의 백수들 노예들 모두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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