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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약 2년간의 회사생활 회고

bravebird 2024. 2. 5. 00:17

그동안 이 회사에 5년 넘게 다니면서 내가 뭘 더 할 수 있는지, 뭘 더 배워 내야 하는지,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어떤 시도를 해야 하는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재 환경상의 난관은 무엇인지... 이미 매일매일 생각하고 반성했기 때문에 회사를 나온 현재 그 어떠한 상처도 고민도 의문도 없다. 이제 내 신경쓸 바가 아니게 되어서 시원할 뿐이다.
 
그래도 이제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놀 것이기 때문에 한번 최근 몇 년의 일들을 정리하고 넘어가자. 왜냐면 별 생각없이 적어놓은 생각들이 몇 년 후에도 여전히 똑같은 화두로 반복되는 경우를 정말 많이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시크릿 같은 것을 그다지 믿거나 좋아하는 사람은 아닌데 나의 생각이 나의 현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런 직접 경험 때문에 믿는다. 또한 회사는 더 이상 내 알 바가 아니게 되었으나, 어쨌든 나 자신을 위해서는 어떤 경험에서건 배울 것을 뽑아내어 철저히 내 것으로 하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
 
 

1. 환경상의 난관

 
최근에 우연히 아는 분(개발 조직의 수장, 즉 기획자 조직으로부터 의뢰받은 업무를 수행해야 하는 조직의 수장)의 이력을 보다가 아래와 같은 부분이 매우 인상 깊어서 메모해 두었다. 리더로서 이러한 트랜지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그 리더는 정말로 굉장히 뛰어난 사람으로 그런 분 밑에서 열심히 한번 일해보고 싶다.
 
"기능 중심 조직에서 목적 조직으로 체계 변경"
"업무 및 협업 방식 재정의"
(이게 가능하려면 강력한 스폰서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댓글이 붙어 있었음. 백번 동의함.)
 
이게 최근까지 다닌 회사에서 도저히 내 역량과 권한으로 해결할 수가 없었던 환경상 난관이자 가장 큰 불만 사항과 직접 관련된 내용이다. 우리 팀은 절대적으로 기능 중심적인 조직으로 마치 사내 하청 같았다. 우리 팀은 우리 팀장도 아닌 다른 팀 팀원들이 시키는 일을 하느라 업무상 주도권이 거의 전혀 없었고 그렇게 일하면 고민이 필요없으니 쉽기는 했으나 내 성격에는 매우 맞지 않았다. 특히 나는 이 업무를 이미 4년 해왔기 때문에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 중에서는 제일 오래 해와서 이미 지겨울 만큼 숙련이 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팀 팀원들, 특히 이 업무를 한참 모르는 사공들이 계속 늘어나기만 하면서 나에게 일 시키는 사람만 늘었다. 내가 나무라고 치면 위로 뻗어나가는 형상이 아니라 분재처럼 사방에서 내리눌리는 형상이었다. 그들의 업무 요청 내용은 예컨대 뜨거운 얼음을 기체 상태로 가져오라는 식으로 말이 안 되었다. 예산을 할당해 주지 않으면서 KPI는 자기 마음대로 나와 상의도 없이 비현실적으로 본부장에게 보고한 후에 들이밀었다. 관리해봐야 도저히 의미가 없는 전혀 중요치 않은 것들을 사사건건 관리하는 것은 기본이었다.
 
업무나 조직 상황 자체에도 권태를 느꼈지만 연봉 역시 상한에 도달했다는 것을 작년 중순쯤 알게 되었다. 이렇게 모든 면에서 답답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승진 또는 이직을 노려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근데 승진을 해도 업무의 내용이나 조직 구조가 달라질 수 없었다. 연봉 밴드만 조금 늘어날 뿐. 내게 크게 매력이 없었다.) 어쨌든 돈푼이라도 더 받기 위해 승진하려면 어떤 이니셔티브를 제시하고 다른 사람들을 직접 움직여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내고 성공시켜야 한다. 그러나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의 다른 팀에서 아예 우리 팀장조차 패스하고 몇 개월씩 걸리는 일을 연달아 시키면 전부 다 해줘야 되는 그런 구조에서 내가 주도해서 뭔가 이끌어 가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팀은 예산 컨트롤 권한 자체가 미미하다. 예산 자체가 다른 팀에서 주어졌고 그냥 거기서 제멋대로 떼어 주는 만큼 군소리 없이 받아서 써야 했다.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알아서 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팀장님이 갑자기 밑도끝도 없이 전략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것도 연중 내내 무슨 문고리처럼 다른 팀 시키는 일만 하도록 해놓고는 갑자기 연말이 되니까 전략 좀 가져와서 다른 팀을 설득해보라는 것이다... 그 말은 자신도 다른 팀이 설득이 되지 않으니 니가 좀 해보라는 의미 아닌가. 그러나 제일기획이 삼성전자 전사 차원의 마케팅 전략을 직접 짜서 실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충청북도가 대한민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구상하고 집행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팀과 타 팀의 관계는 마치 그런 입장이었다. 팀장님께 이러한 협업 구조 자체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으나 별반 도움이 되어 주지 못하셨다. 회사 자체에서 협업 구조를 이렇게 짜 두었기 때문에 우리 팀장 개인이 어떻게 하는 것도 어려웠으리라는 것은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갑자기 연말에 자신이 해결 못하는 일 때문에 내 고과를 건드리는 것은 좀 선을 넘었다.
 
인간의 7대 죄악이 교만, 인색, 질투, 분노, 색욕, 탐욕, 나태라고 하는데 이 중 분노에 특히 취약하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것을 갖다가 내 탓을 하면 그것도 내 잘못입니다 해야 하나? 내가 봤을 때는 회사의 협업 구조 자체가 노답이라 우리 팀이 주도적으로 전략을 짜고 예산을 쥐고 실행을 할 수 있는 그런 팀 자체가 아니었기에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점을 문제 제기를 했다고 도리어 내 개인 고과로 책임을 져야 해? 팀장도 일 년 내내 손을 놓고 있던 문제를 내가 못 풀었다고 갑자기 연말에 와서 내 고과로 책임을 져야 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몇 년간 이미 다른 일로도 수인 한도를 넘었기에 여기서마저 더 참고 숙이기만 하면 자기 자신에게 평생 너무나 미안하고 죽기 전에 자리에 누워서도 원한으로 남아서 악귀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때부터는 용기를 내어 직을 걸기로 했고 마지막으로 내 할 말이라도 분명히 하기로 했다. 이건 팀간 협업 구조 자체의 개선이 선행되어야 하는 사안임을 피력했다. 한편 그때부터 짐을 다 싸고 컴퓨터를 다 정리해 두었다. 사람들이 11시에 출근해서 2시까지 점심 먹는 동안 나는 근태를 더욱 엄격히 했다. 시그니엘 같은 데서 1박씩 하며 몸도 못 가누면서 흥청망청거리는 전사 행사 같은 것은 거절하였다. 딱 질색이다. 그런 식으로 하면 회사 사정이 당연히 어려워지지. 맡은 일은 다 해냈지만 내 건강과 마음의 평안을 최우선순위로 하였으며 승진이나 고과에 대한 마음은 전부 놓았고 떠날 준비를 했다. 그리고 회사 상황이 악화되면서 정말 내 생각대로 되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2. 앞으로 잘해야 할 점

 
그러니까 어떤 의미에서 나는 회사와의 이별을 직감하였으며 심지어 결론을 빨리 보기 위해 무의식 중에 그쪽으로 몰고 간 면마저 있다. 지금 시간이 지나서 다시 생각해 보아도 당당하고 후회가 없고 스스로가 약간 자랑스럽기까지 하다. 난 정확하게 사태를 봤고 할 일은 다하였고 할 말도 하였으며 구차하지 않았어!!
 
그러나 몇 가지 생각해볼 것들은 남아 있다.
 
나는 이건 이래야 하고 저건 저래야 하고 이건 옳고 저건 그르고 하는 식의 원리원칙적인 사고가 진짜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7대 죄악 중에서 분노에 매우 취약하다. 이런 성정은 일관성이라든가 개성을 확보하는 데는 그간 무척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집단 내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소수자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때는 스스로가 너무 취약해진다. 이번에는 내가 마음이 다 떠났고 회사에 더 바라는 것이 없었으며, 주변에 맞춰 구부러지기보다는 그간 가스라이팅 당해온 나 자신을 강력히 옹호할 필요성을 더 크게 느꼈기에 그냥 뚝 부러지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미래에 만약 내가 어떤 집단에 더 남아 있고 싶고 그곳에서 취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면 필히 화를 참고 휘어지고 구부러져 가며 앞날의 더 큰 이익을 도모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내가 보스이거나 부모이거나 하여 보호하고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있다면 더더욱 그럴 수 있어야 한다. 만사에 천천히 반응하고 관망할 줄 아는 여유를 가지며 심호흡을 하고 수양을 합시다.

또한 내 권한 범위를 넘은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내 상위 결재자들과 주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직전 회사에서는 만정이 다 떨어졌기에 그렇게 하지 못했고 할 수 없었다. 다음번엔 이런 부분을 노력해 보자.
 
일 관련해서 자주 상의를 하는 매우 소중한 친구가 있다. 이 친구를 안 지 8년이 넘은 것 같은데 나이를 잘 모르지만 한 열 살은 많을 것이다. 한국인 이민자로서 외국 회사에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친구이기 때문에 회사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가끔 논의한다. 그 친구가 이야기해준 내용이 너무나 적확하며 매우 귀중하기에 정리해 둔다.
 
너네는 하이브리드 조직으로 가야 된다. 수동적인 서비스 제공자가 아닌 능동적인 조력자가 돼야 해.
원래 외국계는 엄청난 세일즈 조직을 동반한다. 기본적으로 상품 개발이 없기 때문이지.
그래서 세일즈가 막강한 파워를 지니게 되는데 이를 역으로 끌어가는 게 내 기술이야. 그래서 내 조직을 더 돋보이게 하지.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세일즈를 압도할 수 있는 기능을 활용해.
예를 들어 데이터 분석, 그리고 분석에 그치지 않는 actionable insight.
이것을 가지고 명령을 주기 시작하면 우리가 세일즈 위로 가는 거지.
그렇게 하기 위해 리더가 갑바가 있어야 하고 비전이 있어야 해. 왜냐면 리더는 앉아 있어도 월급 더 받으니까.
 
만약 미래에도 기능 중심 조직, 오퍼레이션 중심 조직에서 세일즈 팀, 매출 담당 팀을 서포트하는 입장으로 일해야 한다면 이러한 점들을 반드시 염두에 둘 것이다. 친구로부터 이 조언을 구한 후에 데이터 분석 쪽에 매진을 하기로 개인 목표를 잡고 팀장에게도 말하여 노력하던 중에 회사를 나오게 되었다. 난 진짜 건설적인 방향을 제시했었다고 본다. 뭐 그 결실은 볼 수 없었고 나머지는 회사에서 알아서 하든가 말든가 할 것이며 나는 다음번에 이런 부분을 계속 노력해볼 것이다.
 
또한 잘한 일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잘 포장하여 전달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 이러한 부분에 언제나 굉장히 약했다. 그냥 조용히 성실하기만 한 편이다. 그리고 불행히도 우리 팀장님도 좀 그런 편이었다. 실무자일 때는 묵묵히 성실해도 괜찮다 쳐도 만약에 내가 리더이다? 다른 사람을 성장시켜 줄 책무가 있는 사람이다? 그럴 때는 그래선 안된다. 마케팅을 좀 배워야 한다. 자존심이 다소 허락지 않으나 자본주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 모수자천의 자세를 배웁시다.
 

 
3. 정말로 잘한 점

 
회사를 나오기 몇 개월 전부터 하도 마음이 답답해서 미래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 친구분 중에 그런 능력이 있는 분이 있다고 해서 좀 물어봐 달라고 했었다. 그때 딱 이렇게 여쭸다.
 
제가 이곳에서 1~2년 내로 더 해내야 하거나 배워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까?
이곳을 하산하고 다른 산을 올라도 되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아직 오를 곳이 더 남았나요?
 
어쨌든 결론적으로 회사를 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 분의 어떠어떠한 예언은 빗나갔다. 그러나 어차피 내용을 듣고 나면 그에 반응해서 또 다 바뀌어 버리는 미래 같은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 말씀에 힘을 얻어서 심기일전할 수 있었다는 것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정말 좋은 질문을 했다는 것이다. 처해 있었던 환경에 분명히 한계가 있었던 건 맞는데, 그런 큰 벽을 만난 것 자체가 뭔가 도약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내가 현재 못 보고 있는 것 중에서 더 배우고 노력해야 할 것이 있는지를 구한 것이다. 제가 잘될까요? 잘 풀릴까요? 승진 될까요? 이직 가능할까요? 처럼 내가 받을 걸 물은 게 아니라 제가 뭘 할 수 있나요? 더 배워야 할 것이 남아 있나요?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행동에 대한 건설적인 질문을 한 것이다. 앞으로도 딱 이런 생각으로 살면 망하려야 망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취지의 질문을 다시 던지고 답을 되새겨 보고자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1번에 쓴 건 잊어버리고 2번에 쓴 건 외워라. 될 때까지 계속 해라.
 
더하여 안 좋은 상황에서도 심신의 건강을 잃지 않았다. 더욱 견고한 일상을 만들어 갔다. 할 수 있는 노력도 다했고 쓸 수 있는 수단도 전부 다 소진했다. 비록 패배했지만 부끄럼 한 점 없으며 미련이 전혀 없다. 비록 지난 몇 년간 분노의 격발을 좀 많이 경험하였고 정이 다 떨어졌으나 현재 그러한 분노도 다 사라졌다. 회사를 나오게 되면서 그간 모든 분노의 원인들이 나랑 아예 관련 없어졌다고 느끼면서 한순간에 감정이 다 풀려 버렸다.
 
원래 이 글은 좀 통렬히 반성을 하려고 시작했는데 다시 생각해봐도 이번엔 너무나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다른 사람들이 비록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철저히 패배한 게 맞을지라도, 비록 실업자일지라도 그렇다! 한번씩 상담에 가면 선생님이 본인은 굉장히 스스로에게 가혹합니다, 자기 안의 감시관을 주말 단 이틀이라도 휴가 보내세요, 스스로를 용서하세요, 그게 어려우면 스스로에게 사과를 해보세요, 라고 말씀해주실 정도의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서 이 정도의 자부심이 드는 것은 꽤 이례적인 일이라 굉장히 기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좋다.
 
자 이제 생각은 다 하였고 오늘까지는 신변 정리와 각종 해야 할 일들을 하였으며 내일부터는 대구며 부산이며 지구 반대편이며 맘대로 쏘다니면서 신나게 놀 것이다. 존나좋군.
 
https://www.youtube.com/watch?v=l7wztvOlCv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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