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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서 만난 사람 - V 본문

일상

부산에서 만난 사람 - V

bravebird 2024. 2. 8. 00:01

하.. 다 쓴 글이 파이어폭스가 꺼지면서 다 날아갔어 ㅋㅋㅋㅋ 엄청 정성들인 장문이었는데...
 
여하간 첫날 부산에 도착해서는 저녁 때 러시아 친구 V를 만났다.
 
때는 겨울이었다 ㅋㅋㅋㅋ 2014년 겨울에 러시아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에서 알게 된 분이다. 짐을 다 찾고 이제 시내로 들어가는 지하철역에 가려는데 뒤에서 누가 부산 사투리로 말을 걸었다. 뒤를 돌아봤는데 한국인 비슷한 사람도 없었다. 뜻밖에도 러시아 아저씨 한 분이 한국어로 말씀을 하시더라고.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올 때부터 봤는데 여자 혼자서 용감하게 러시아를 온 게 신기해서 말을 걸어보고 싶었다고 한다. 지하철 타러 가는 길을 헤매고 있는 걸 보고 딱 알고는 지하철 찾냐고 말을 걸어 주신 거다. 몇 정거장을 이동하는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이메일 주소를 교환한 게 지금까지 연락이 이어졌다. 한국인들과 일을 많이 해서 주로 번역에 대해서 많이 물어보셨고 또 명절만 되면 인삿말을 건네 주셨다. 그러니까 햇수로 11년째 아는 거야 이미.
 
2014년 당시 V는 음주운전을 해서 추방을 당해 고향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ㅋㅋㅋㅋㅋ 몇 년간 러시아에서 사시다가 지난 몇 년 전에 속초로 돌아와서 일하다 부산으로 취업을 해서 지금은 부산에 집도 사서 생활하신다. 지난 2022년 부산 출장 때 드디어 만나뵐 수 있었으니 이번은 세 번째로 뵌 거였다. 부산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집으로 초대를 해주셨는데 내 숙소와도 멀지 않아서 아주 좋은 위치였다. 칼리닌그라드산 코냑을 2병을 말아 잡쉈다. 코냑은 처음 마셔보는 것 같은데 알콜도수가 40도임에도 취하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다음날에 숙취가 없었다.
 
V는 사할린 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으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에서 선박 수리 기술자로 오래 일했다. 아버님은 오데사, 어머님은 오룔 출신으로 소련 시절에 사할린으로 이주하였다. 유대계는 유대계인 것이 최근에 여자 조카 한 명이 이스라엘로 귀화를 했다고 한다. 이스라엘은 여자도 군대 가야 되는데 왜 귀화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ㅋㅋㅋㅋ 또 유럽 러시아에만 살다가 섬으로 들어가기 싫었던 할머님은 1969년도에 혈혈단신으로 시카고로 이민을 가서 사셨다고 한다. 진짜 BADASS!! 하여튼 땅덩이 크기만큼이나, 그리고 독특한 역사만큼이나 개개인의 드라마도 다양한 나라이다.
 
 

 

 

 
 
"이게 뭐예요?"
 
"옷걸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V는 이 정도로 거의 뭐 한국인이다. 이미 귀화 시험은 통과했는데 연봉 조건이 조금 미달이라고 했다. 7~8천만원 조건인 걸로 알고 있는데 이 정도는 내국인 기준으로도 상당히 고연봉이다.
 
여튼 재밌는 얘길 많이 나눴는데 파이어폭스가 다 날려먹은 글을 약간이나마 복구해 본다.
 
 
1. 러시아 국내 여권 갱신
 
바로 전날 V는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캄차트카 반도에 출장을 다녀온 길이었다. 간 김에 러시아 국내여권을 갱신하고 왔다면서 보여주셨다. 나는 각 나라가 사람 개개인을 식별하는 방법, 신분증 제도 같은 것에 관심이 많다. 그 점을 기억하고 사진까지 찍을 수 있도록 해주셨다.
 
러시아는 개개인의 국내 거주지 이동에 대한 정보를 표시하는 국내 여권을 신분증 개념으로 사용한다. 정부에서 일자리와 거주지를 정해주던 사회주의의 영향인 줄 알았는데 제정 러시아 때 도입된 제도라고 한다. 해외 여행용 여권은 따로 있다.
 

 
러시아 국내 여권은 만 20세, 45세에 반드시 갱신하게 되어 있다고 한다. 벌금 맞기 며칠 전에 갱신에 성공하셨다고. 아니 그러면 나랑 띠동갑 말띠시잖아? 내가 지금까지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생각보다는 나이차가 크지 않잖아... 아저씨까지는 아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대학생들이 나한테 아줌마라고 하면 버럭 할 것 같은데... ㅋㅋㅋㅋㅋㅋㅋ 죄송해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에 직접 한장한장 다 읽어보고 알아낸, 러시아 국내 여권에 기재되는 정보 목록.
- 이름, 부칭, 성
- 증명사진
- 성별
- 생년월일
- 고향 (한국에서는 초본을 떼면 아버지 고향 개념인 '본적'이 적혀 있는 게 특이하다는 점을 말씀드림)
- 총 10자리의 개인 고유식별번호 (한국의 주민등록번호 같은 것으로 평생 바뀌지 않음)
- 여권 발행일, 발행지
- 거주 등록 상황 (V의 경우에는 어머님이 계신 우크라이나 근처 벨고로드에 등록돼 있음)
- 징병 관련 정보
- 혼인 상태
- 자녀의 성별, 이름, 부칭, 성, 생일
- 국내 여권 갱신 정보
 
의외로 기재가 안된 정보는 민족. 중국 신분증 상에는 민족 정보가 다 기재되어 있는데 러시아는 그렇지 않다. 인도 신분증도 민족은 기재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엔 있는 지문 같은 정보도 없다. 나는 바뀌지 않는 고유 식별번호로 개개인을 구별하고(즉 이 번호가 없는 사람은 국민에서 배제되고) 신분증에 생체 정보까지 저장한다는 것에 대해 좀 진지하게 생각해볼 점이 있는 것 같고, 다른 나라들은 개인 식별을 어떻게 하는지 예전부터 많이 궁금해 했다.
 
그리고 재밌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나무위키 '러시아 국내여권' 페이지 어딘가에 내 옛날 블로그가 링크돼 있다.
 
https://namu.wiki/w/%EB%9F%AC%EC%8B%9C%EC%95%84%20%EA%B5%AD%EB%82%B4%EC%97%AC%EA%B6%8C

 

러시아 국내여권

러시아 연방 국내 여권 Паспорт гражданин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Internal Pa

namu.wiki

 
 
2. 만 33세 Возраст Христа
 
러시아에서는 만 33세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힌 나이로서 개인의 일생에서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간단히 말하면 논어에서 말하는 '이립'과 비슷한 의미가 러시아에서는 만 33세인 것이다. 진지하게 매진할 인생의 목표를 다시금 정하고 전력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하는 나이이다.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 2월 8일이라 단 며칠 후면 34세로 넘어가는 상황이었다. (이제 2분 남음!!) 게다가 난 33세 마지막 즈음에 회사를 잘리지 않았는가 ㅋㅋㅋ 
 
"이거 딱 니 얘기네! 부산에서 뜻을 정하고 가라!"
 
"Да, вот точно моя ситуация. (맞아요. 정확히 제 상황이에요.) 저 녹화해 둘 테니 제게 행운을 빌어 주세요."
 
"Я всегда желаю тебе счастья и успехов в жизни. Ты очень добрый, активный и трудолюбивый человек."
(나는 항상 네가 행복하길 바라고 성공하길 바라. 넌 친절하고 적극적이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잖아.)
 
"좋은 말씀 해주시고 제 친구 해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3. 한국어 공부에 대한 열망
 
우리는 전부 한국어로 대화를 하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유창하게 잘 하신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사극을 보고 한국인과 똑같이 느끼는 수준까지 도달하고 싶다고 하셨다. 대학 때 수난 이대와 메밀꽃 필 무렵을 읽었는데 쉽지 않았다고 했다. 그럼 저랑 같이 한국 소설 읽어 보실래요? 하고 도와 드리기로 하고 왔다.
 
운수 좋은 날이라든지 소나기라든지 무진기행이라든지 여하간 한국 중고등학생이라면 대부분 알 만한 소설들을 같이 읽고, 어려운 부분들을 잘 이해했는지 궁금한 부분은 없었는지 전화로 확인을 하고, 독후감을 메일로 써서 보내면 봐 드리는 방식으로 하면 엄청 재밌을 것 같다.
 
다만 내가 조만간 한국에 없을 수도 있는데 떠나기 전에 한 편 해보는 게 목표이다. 부모님 댁에 가면 중고등학교 때 보던 소설이나 시선집이 많으므로 제일 쓸만한 것 한두 권만 뽑아서 선물로 보내 드리고 나는 인터넷에서 찾아 읽으면 될 듯 하다.
 
 
4. 러시아 음주 예절
 
이건 전혀 몰랐는데 다 마셔서 빈 술병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면 안 된다고 한다.
 
"Пустую бутылку необходимо ставить под стол."
 
 
5. Моя Москва
 
술도 좀 들어갔고 해서 좋아하는 러시아 노래를 틀고 같이 불렀다. 뇌종양으로 몇 년 전에 작고한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가 부른 My Moscow이다. 언젠가는 이 사람이 출연하는 예브게니 오네긴을 직접 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아깝게도 젊은 나이에 떠났다. 예브게니 오네긴은 내가 사회 초년생 무렵에 절실히 좋아했던 푸쉬킨 소설이며 차이코프스키 오페라이기도 하다. 나의 소원 중 하나는 러시아 현지에서 이 오페라를 보는 것이며 당장 2월 12일엔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이 있을 건데 너무 임박하여서 아마 어렵지 싶다. 하여튼 예브게니 오네긴 오페라를 처음 보러 갔다가 서곡을 듣고 감동해서 그 자리에서 울었다. 이 얘기를 하니 V가 너무나 좋아했다. 또 My Moscow 이 노래를 좋아한다고 하면 러시아 사람 그 누구나 반색을 할 거라고 했다. 내가 낯선 곳에 나가서 항상 별 탈 없이 환대를 받고 대부분 좋은 사람만 만나게 되고 오랜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람들의 고향과 문화를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여 순수한 호기심을 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좋아하는 곳에 와서 만난 새로운 사람들이 무척 반갑기에 별다른 사심 없이 오직 쾌활한 우의로 대한다는 것이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E8QiVpGrfJs

 
https://www.youtube.com/watch?v=Vful8b7eDOI

 
V는 스페인 노래를 많이 듣는다고 했고 또 놀랍게도 아래 노래로 화답해주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l52fKokm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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