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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남아시아

네팔 카트만두 첫째날

bravebird 2024. 3. 4. 02:31

다니며 노느라 바빠 글이 밀린다. 미뤘다 쓰면 날아가는 기억이나 감정이 많다. 그렇다고 매일 쓰자니 워낙 벅차기도 하고 날짜라는 틀에 구속되는 게 영 별로이기도 하다. 걍 쓰고 싶을 때 쓰는 게 제일인데 내가 부탄은 나름 진지하게 관심이 가는 지역이라 사소한 것 하나 놓치고 싶지가 않았고 글 하나 쓸 때 찾아볼 것도 많았고 해서 참 만만치가 않았다. 아직도 한참 덜 썼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자유 일정이니 그저 생각나는 대로 휘갈기거나 아예 기록을 건너뛰고 그저 소요하는 날도 있을 수 있도록 해야겠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카트만두는 지금 비가 온다. 물웅덩이가 이곳저곳 생겨 있고 구정물이 흐른다. 내일도 이렇게 비가 온다면 포카라 가는 것은 미루고 그냥 주로 방에 있는 것이 낫겠다. 여긴 비행기 사고도 잦고 도로도 험하니 안전할 때 움직여야 한다. (합법적 게으름 개이득)

현재기온 13도라는데 아까 나갔다가 방으로 돌아올 때 쌀쌀했다. 물을 틀어보니 온수가 나오긴 하나 애매한 온도다. 워낙 추워 샤워는 좀 힘들게 되었다. 온수와 난방이라는 것이 이렇게 귀중한 것이다... 13도인데도 추워 씻지 못한다.

그리고 어!! 왜 외국 나오면 샤워기가 전부 해바라기 샤워기인 거여!! 해바라기 샤워기는 온수가 귀한 네팔이나 인도 같은 데서는 물낭비가 극심한 방식이라 이걸로 샤워를 하면 당신은 샤워를 끝내지 못한다. 중간에 온수가 무조건 끝난다. 반드시 양동이에 온수를 담아서 조금씩 아껴 써야 한다. 게다가 해바라기 샤워기는 선택권도 주지 않는다. 예컨대 머리만 감고 싶거나 발만 씻고 싶을 때도 샤워기 높이 때문에 결국 옷을 다 벗어야만 한다. 추워 죽겠는디. 해바라기 샤워기 철폐법 제정하라!!!!

추워서 타이항공 담요 가져온 걸 꺼냈다. 부탄은 숙련된 가이드와 드라이브가 다 해주었고 3성 이상 숙소에 가야만 하는 여행이었다. 이제 네팔부터 몇 개월간은 진짜 내가 다 알아서 해야 하며 헝그리 여행이다. 집에서 휴젠뜨로 화장실 따뜻하게 데워놓고 온수 너무 뜨거워서 보일러 온도 조절까지 하고 맨날 비타민 바르고 손빨래 한번 하지 않아도 맨날 뽀송한 옷 입던 게 참 그립다. 대한민국의 생활환경은 진짜 호강에 겨운 수준인 것 같다.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자니 정말 별게 다 감사하다. 절에 갈 때마다 감사하다는 기도만 하게 된다 진심으로.



그동안 책 산 것과 조금 필요없어진 것들을 집으로 택배 부치려는데 카트만두 우체국 리뷰가 너무나 형편이 없어서 인도 가면 부쳐야 될 것 같다. 실제 무게보다 더 무겁게 매겨서 돈을 뜯는 것 같다.

그래도 오늘 부탄의 마지막 숙소를 떠나기 직전에 전날 홀연히 잃어버렸던 이어버즈 한 쪽을 기적적으로 찾았다. 거기에... 감사하게도... 여기 카트만두에서 내 모든 카드가 든 지갑을 잃었다가 그대로 찾았다. 들렀던 서점에 놓고 온 것이었다. 아래층 카페에 한참이나 앉아 있다가 계산할 때 깨달았다. 퍼뜩 올라가 봤더니 서점은 문을 닫았던데 카페 직원에게 서점에 좀 연락해 달라고 부탁했더니 다행히 그 위층에 주인 아주머니가 살고 계신 게 아닌가. 바로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직주근접의 위대함!!!! 네팔의 위엄!!! 진짜 얼마나 놀랍고 다행한 일인가.


보다나트 스투파


어제는 숙소 마당 돌길에서 신발끈이 풀린 걸 밟아 버려서 진짜 제대로 크게 넘어져 다쳤다. 그래도 팔꿈치만 조금 까지고 무릎에 약간 타박상을 입고 태블릿 커버가 긁혔을 뿐 뭐가 부러지거나 얼굴이 어떻게 되거나 하지 않아서 천만 다행이다. 또 어제는 등산복 바지를 빨아서 히터 위에 얹어 놓았다가 해먹어서 버리고 왔다. 그간 다른 옷들은 다 괜찮았는데 그 재질만 열에 약한지 몰라 실수를 했다. 그래서 옷이 한 벌 줄어들어 아마 새로 사야 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얇은 여름용이었으니까 더 추운 데서 쓸만한 거 새로 사면 되니 오히려 좋아.

또 이번에 다니는 절마다 사람들 기도를 했는데 우크라이나 친구 한 명이 자기 취직됐다고 연락이 왔다. 직장 동료였는데 영국에서 일하면서 본국의 가족들을 데려와 피난시켜 살고 있다가 이번에 약혼자와 자신 둘다 정리해고가 된 경우였다. 아버지는 징병 되셨고. 이 가족이 하도 생각이 나서 내 안부를 전하며 이번 여행 중 아름다운 성지에 들를 때마다 꼭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다음날로 취업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워낙 뛰어난 사람이라 당연히 자기가 잘해서 된 거지만 뜻밖의 좋은 소식에 참 기분이 좋았다. 결국 이 친구는 가든리브가 끝나면서 바로 취업을 하게 되어 공백기간도 없는 셈이고, 정리해고 때문에 위로금을 챙겨받게 되었고, 근무조건도 풀리모트로 바뀌어서 조국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약혼자와 같이 이사를 준비할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모든 게 더 잘된 셈이다. 우리가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수 있기를, 아버님이 무사하시기를, 어서 전쟁이 끝나 모든 가족이 다함께 살 수 있기를 가는 절마다 계속 기도할 것이다. 이 친구 말고도 요즘은 정말 절만 가면 떠오르는 얼굴마다 감사하다고 기도한다. 오늘 내가 이런 모습으로 이런 생각과 경험을 하면서 하루하루 무탈히 살아가는 것이 진짜 많은 사람들 덕분인 것 같다.

이외에도 특별히 멋진 일들이 많았지만 글로 쓰니 차마 다 전해지지도 않고 재미가 없는 것 같아서 차차 쓰든지 나 혼자 알고 있든지 해야겠다. 근데 요즘 내 글을 재밌다고 해주는 사람도 많았어서 그것도 참으로 의외이고 감사한 일이다. 나의 기나긴 독백과 나 혼자만 재밌어 하는 이런저런 일들이 남한테도 재미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좀 신기하다. 재밌게 봐주는 친구들 고마워. 여행은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고마운 일들을 생각하면서 매일 잘 놀아 봐야겠다. 재밌는 이야기 들려줄 수 있는 할머니로서의 경험치 스펙은 매일매일 진짜 한껏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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