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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남아시아

네팔 랑탕 트렉 다섯째날

bravebird 2024. 3. 31. 22:03

일어나 보니 눈이 많이 내려서 고도가 거의 5천미터가 되는 체르코 리는 생략하기로 하고 하강을 시작했다. 랑탕 트렉은 온 길을 그대로 돌아오는 거라 조금 재미가 덜한 것 같다. 하루종일 재게 걸어서 둘째날 묵었던 롯지로 돌아오니 밖에는 지금 비가 많이 온다. 밍마 아저씨가 보통 이틀 걸리는 길을 하루만에 온 거라고 한다. 어제 오늘 실컷 걸어서 4일 일정을 2일로 단축한 것.


금일 33,047보 걸음
금일 이동거리 20km 초과
금월 매일 활동 목표 달성 (31/31)



요즘은 공간지능이나 스페이셜 메모리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한다. 카트만두에서 더르바르 광장에 갔다가 12년 전 앉아 있었던 자리가 다 떠오른 것에 조금 놀라서였음.

난 여행을 할 때 손으로 적는 메모장을 지참해서 다닌다. 직접 손으로 메모를 하면 빠르고 편리하며 폰에 타자를 치는 것보다 경청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 노트라는 공간 상에서 내용의 배치를 자유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트는 평면이기도 하지만 두께라는 개념도 있기 때문에 이런 3차원 공간 위치를 내용 배치와 내용 로딩에 활용을 한다. 무슨 내용을 어느 위치쯤, 어떤 내용 근처쯤 적었는지를 공간적으로 기억해서 노트를 조금 넘겨다 보다가 금방 찾아낼 때가 많다. 반면 휴대폰 메모장에 적었거나 영상을 찍었을 경우에는 정보 보존이나 복제는 쉽지만 키워드 자체나 메모 날짜를 기억해야 찾아낼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외국어로 된 책을 읽을 때도 공간 기억을 많이 활용했었다. 책을 보다 보면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가 있는데 일단은 그냥 추측만 하고 넘어가지만 더 읽다 보면 반드시 찾아봐야 하는 핵심어임을 발견할 경우가 있다. 그런 경우에 단어의 모양새나 스펠링을 기억한다기보다는 몇 쪽쯤에 나왔고 그쯤을 펼쳤을 때 평면 좌표 어디쯤이었는지를 기억하고 있다가 거기로 돌아가서 다시 찾는다. 그러니까 단어의 3차원적인 위치를 기억하는 것이다. 이게 실물 책일 때는 단어의 대략적인 생김새나 문맥뿐 아니라 책의 쪽수나 두께나 평면상 위치 같은 다양한 종류의 정보가 기억의 마커로 작용해서 그 부분을 넘어간 후에도 돌아가서 찾아내기가 쉬운 반면, 전자책일 때는 딱 표시를 해두지 않는 이상 페이지를 한번 넘어가면 끝이다. 전자책은 무게가 가벼워서 참 유용하긴 한데 매체 특성상 물리적인 위치 정보를 이용한 내용 브라우징을 할 수 없어서 한번 읽고 나면 끝인 게 좀 아쉽다. 내가 책 둘 공간이 많은 부자면 실물책을 갖고 있는 게 훨씬 낫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여튼 나는 여러 종류의 정보를 저장하고 로딩하는 데 3차원 공간 정보를 엄청 활용한다. 자료 간의 위계 관계 같은 체계적인 구조를 표현하고 저장하는 데 있어 공간 요소는 필수적인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실물 책이나 손필기는 여전히 진짜 중요한 수단이고 디지털 기기와 상호보완적으로 잘 사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 내가 혼자 여행을 훨씬 선호해온 중요한 이유가 공간 정보에 대한 것 때문이다. 처음 가는 곳에서 공간 정보를 파악하고 활용하는 게 나한테는 되게 중요하고 재밌고 여행의 핵심적인 부분인데 이게 일행이 있으면 일행한테 길찾기를 꽤 의존하게 돼서 내가 어딜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아니면 일행과의 의사소통이나 감정교류 같은 다른 어려운 작업을 동시에 처리해야 돼서 공간 정보 인식을 잘 못한다.

내 공간지능이 어떤 수준인지는 잘 모른다. 그러나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분야에서 정보 조직과 배치를 위해 공간 요소를 많이 활용해 왔다는 걸 깨달아서 갑자기 이 주제에 궁금증이 생겼다. 공간지능 정식으로 측정할 방법 있으면 해보고 싶어 ㅋㅋㅋㅋ 도형 빙빙 돌리고 이런 거 그다지 안 좋아하긴 했다. 다만 중학교 2학년 수학에서 배우는 기하 파트를 되게 좋아했다. 이후에는 기하는 거의 안 배워봐서 잘하는지는 잘 모르겠음. 길은 대충 잘 찾아다님. 그리고 직접 길을 더듬어 가며 가본 곳에 대해서는 구조를 잘 기억하는 것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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