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 요새
남체 복귀, 3패스 트렉 거의 종료 본문
여행기는 날짜대로 성실히 기록한다는 암묵의 룰에 어긋나기에 이 글은 언젠가 사라지거나 다른 글에 통폐합될 수도 있다. 하지만 3패스 트렉이 거의 끝난 것을(즉 전기와 인터넷이 드디어 가능해진 것을) 기념하여, 조만간 바빠진 후 귀찮음에 잠식당하기 전에, 아무 말이나 써두겠다.
에베레스트의 장엄한 아름다움 같은 내용은 아니라 아주 하찮고 사소하고 더럽기 때문에 히말라야 하면 응당 동반되는 멋진 감상에 가려져서 잊힐 내용이다. 또 미래에 이 힘든 짓을 기어이 또 사서 하려고 할 수 있는 나 자신에게 꼭 남겨 두어야 할 내용이다. 역사를 잊은 자에게는 미래도 없다 이 미련한 것아.
사실 추워서 씻으러 가기가 소름 끼치기 때문에 이러고 있다는 것은 굳이 숨기지 않겠다. 여기도 3400미터가 넘는 엄연한 고지대고 저번에 안나푸르나 서킷 끝나고 3600미터에서 샤워를 하려다가 쌍욕을 한 기억이 너무 선명하므로 굳이 욕 나올 짓을 반복하지 않겠다.
이번 트렉에서 5550m 높이를 도달하고 빙하를 세 번쯤 건넌 것보다 실은 2주째 샤워와 샴푸를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이 더 대기록이다. 매일 항상 두 마음이 싸웠다. 너무나도 씻고 싶은데 너무 추워서 절대 씻기 싫은 마음. 한번 와보세요. 절대 못 씻음. 그런데 몸이 적응을 하는 건지 신기하게도 피부가 가려워 미치겠거나 하지는 않다. 전혀. 다만 먼지와 물아일체가 되었음에도 대충 물티슈로만 훔치고 그대로 잠을 청해야 하는 것이 싫었다. 그것도 2주 넘게 매일 매일. 나중에는 아예 물 자체가 없는 롯지가 많았다 ㅋㅋㅋㅋ 걍 춥고 자시고 간에 아예 씻는 게 원천 불가. 가끔 미네랄 워터로 양치하고 손 씻어야 했고 세수는 물티슈로만 가능 ㅋㅋㅋㅋㅋ 1일 1양치... 1일 0세수... 내 개복치 잇몸이 너무 염려스러웠다.
이쪽 지역은 안나푸르나 서킷처럼 실제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아니라, 오직 트레킹 성수기 몇 달간만 운영하는 인공적인 롯지가 많아서 기초적인 수도나 전기 시설이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아 보였다. 모든 걸 포터들과 야크들이 이고지고 나르므로 물가 역시 북유럽 뺨칠 수준으로 비싸다. 전기 충전, 와이파이, 식수, 샤워... 하여튼 그 모든 게 전부 돈이다. 핸드폰 풀 충전에 1만 5천원 내야 되는 곳도 봄. 애기 발바닥만한 초콜렛 1개 4천원. 신라면 한 그릇 1만원.
하여튼 딴소리로 샜고, 아직도 너무 춥다. 몸에 물을 끼얹어도 소름이 돋지 않는 약속의 땅 카트만두로 돌아갈 때까지는 절대 옷을 벗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샤워해 봤자 옷 자체가 흙먼지에 야크똥 분말 투성이라 옷부터 다 바꿔 치워야 한다. 처음 며칠은 물티슈로 정성스레 바지를 닦았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그 다음날이면 원점회귀이므로 이젠 다 내려놓았다. 우리집 세탁기가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해요 엘지...
잠잘 때의 추위는 옷 3겹에 이불 2개에 수면양말과 장갑과 모자까지 아예 완전 군장을 하면 괜찮았다. 침낭은 필요 없었다. 난 침낭이 있어도 자꾸 걷어차는 편이다. 필수품이 아니라고 본다. 롯지 다이닝룸의 난롯가를 떠나 나무판대기로 벽을 만든 냉방 침실로 들어올 땐 망국민의 심정이다. 그래도 누워 있으면 체온으로 덥혀지기도 하고 새벽 6시부터 일어나 하루종일 걸은 피로가 상당하기에 저녁 8-9시인데도 잠을 들 수가 있다. 가장 바깥쪽 레이어의 옷은 가급적 등산용과 취침용을 구별해서 사용하고자 노력했지만 패딩과 넥워머는 잘 때도, 특별히 추운 날 걸을 때도 모두 사용했기에 걍 포기했다. 먼지를 벗삼아 잤다.
걷는 중 최우선 과제로 삼고 노력한 것은 밖에서 똥오줌 눌 일이 결단코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 소원은 이뤘다. 덕분에 추운 밖에서 용변 보느라 체온을 낭비할 일은 없었고 휴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밖에서 오줌을 눠야 했으면 바지를 내리는 순간 1차, 오줌이 발사되는 순간 2차로 진짜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기어이 여기까지 온 나를 욕했을 것이다.
햇볕에 타지 않고 피부를 잘 지키는 것도 꽤 중요한 과제였다. 걍 다 꽁꽁 싸매고 다니고 SPF 75짜리 자외선 차단제를 썼다. 그러나 빙판으로 된 촐라를 넘을 때 얼음에 반사된 자외선에 노출되어 복면 모양대로 얼굴이 타고 말았다. 추워서 그런가 먼지 때문인가 비알레르기성 비염이 유발돼서 콧물이 무한 생성되는 바람에 호흡이 너무 방해되길래 복면을 귀에만 건 채로 턱까지 내리고 있었는데 그 모양대로 조커 입 모양처럼 탔다. 너무 속상하다. 뷰티 월드에서 나는 그야말로 최후방 수비수를 플레이하고 있는데 방어선이 너무 속수무책으로 뚫려 버렸다. 이제 이대로 시킴에 가면 그냥 현지인이다. 셰르파인 본인들이 나한테 현지어로 말을 거는 그곳.
이번 트렉에서도 하루 정도 잠깐 마일드한 두통을 제외하고는 고소 적응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걸 믿고 하루 0.5리터 정도만의 물을 마신 날이 많았는데 다행히 멀쩡했다. 물이 비싸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야외 용변 최소화를 위한 노력이었다. 도저히 이건 내려놓지 못했다. 부끄러운 것보다는 추운 게 싫었어 진심으로. 실은 고산 적응을 위해서는 보통 하루 4리터 이상을 마실 것이 권장된다... 근데 물 마시는 것 자체도 소름 돋게 추워서 잘 못 마시겠다.
고산증은 없는 대신 다리가 매우 피곤했다. 포터를 따로 고용하지 않았기에 10kg 이상 되는 짐을 직접 지고 다녔는데 바위가 널부러진 콩마라의 미친 빙하를 횡단한 이후부터는 대퇴의 근피로가 잘 회복되지 않았다. 업힐 구간에서는 항상 다리가 터질 것 같았고 계단만 나오면 진심 때려 부시고 싶었다. ㅋㅋㅋ
다만 그 덕분에... 인간불신의 흔적이 역력하며 무엇보다 너무 차가워서 도저히 앉을 수가 없는 롯지 변기에서 투명의자 용변을 보아도 이제 아무 피로감도 없다. 네팔에서 한 달 꼬박 산에서 산 결과 썩 근육질의 다리를 갖게 되었다. 이제는 등을 열심히 조져야 하지 않겠는가. (?) 등 어깨 삼두를 키우려면 뭘 하지 하는 생각을 걷는 중 많이 했다. 로잉을 제외하고는 아마 등반이 거의 최고의 방법 중 하나일 것 같다. (?????)
저 또 산에 간다고 하면 누가 좀 조 패주세요. 이거 끝나고 인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 이런 데로 가도 히말라야 파미르 따라 다닐 것 같은데 등산화 불태우고 갈까요? 배고파 죽겠는데 여기서 튀겨서 먹어 치우고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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