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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정신 차리고 제시간에 약속에 나갔다. 흐린 날씨였는데 주코프 동상이 회색 톤으로 더 근사하게 보였다. 매우 흡족한 사진들을 여러 각도에서 찍었다. 오늘의 행선지는 대조국전쟁 박물관과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대조국전쟁 박물관이 있는 파크 포베디로 가서 건물 앞 오벨리스크와 성 게오르기 동상 사진을 실컷 찍었다. 기마상을 아주 좋아하는데 오늘따라 멋진 사진들이 잘 나와줘서 기뻤다. 대조국전쟁 박물관은 참 컸다. 각개 전투별로 디오라마도 잘 꾸며져 있고 볼거리가 많은데, 너무 많아서 트래픽에 무리가 왔다. 좀 피곤했다. 현대사 박물관이 있는 트베르스카야 거리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가는 길에 알렉산드르 아저씨에게 크림 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여쭤봤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크림 주민투표 결과를 받아들인다..
새벽까지 논 덕분에 정통으로 약속에 늦었다 -_- 9시 반까지 붉은광장 주코프 동상 앞에서 알렉산드르 아저씨 만나기로 했었는데 거의 1시간 넘게 지각하여 송구스러웠다. 서브웨이 샌드위치 먹고 나서 고리키 집, 알렉세이 톨스토이 집, 츠베타예바 집, 체호프가 의사로 일하면서 살던 곳, 레르몬토프 생가, Patriarch's 연못과 거기 있는 키릴로프 우화 기념비들을 죽 돌아봤다. 우화 내용을 조각해놓았는데, 거대한 코끼리를 쳐다보면서 계속 캉캉 짖어대는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우리 부서의 한 상사가 생각났다. 짖지 않으면 남들 앞에 약해 보이는 줄 알고 계속 쓸데없이 벽 보고 짖는 그 분. 알렉산드르 아저씨에게도 이미 메일로 얘기해준 적이 있는 사람이라 같이 떠올리며 엄청 웃었다. 저녁에는 아르바트 거리의..
벨로루스키 역에 도착해서 저번처럼 지하철 타는 곳을 못 찾고 헤맸다. 두리번거리던 중에 누가 한국말로 말을 걸기에 화들짝 놀라서 돌아보니 웬 러시아 아저씨였다. 한국에서 20년 산 분인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 하셨다. 이름은 블라디미르. 슬라브 계열 성씨가 아닌 것 같은데 배경이 조금 궁금하다. 친해지면 여쭤 봐야겠다. 지하철 표도 하나 사 주시고, 숙소가 있는 키타이 고로드 지하철역까지 짧은 길이지만 동행이 되어 주셨다. 내리기 전에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도착해서는 쿠즈네츠키 모스트의 어느 바에서 열리는 카우치서핑 모임에 나갔다. 러시아에 코가 꿰이는 바람에 이제 자주 드나들 것 같으니까 현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서 출발 전날밤 급히 가입한 카우치서핑. 떠들썩한..
일리야 레핀, 1901년 5월 7일 국가의회 100주년 기념 국가평의회 크게 보기 레핀의 그림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 중에서 구도의 드라마틱함 측면에서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과 함께 최고가 아닐까 싶다. 화폭 안에 수십 명의 사람들이 있는데도 당장에 니콜라이 2세에게로 시선이 가 꽂힌다. 황제가 가운데에 있지 않은데도 눈이 그리로 간다. 내가 결코 한 그림 오래 살펴보는 눈썰미 있는 사람이 아닌데도 그랬다. 러시아 박물관 가면 한 전시실의 벽면을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데, 내가 마치 저 안의 조그만 한 부분이 된 것처럼 실내를 가득 장악하고 있는 그림이었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미술에 문외한인데다가 러시아 화가 하면 샤갈이랑 칸딘스키밖에 모르고 내 취향도 아니어서 전혀 기대 않고 갔던 게 러시아 박물관..
니콜라이 레릭, Guru Guri Dhar 여름에 모스크바 여행 갔을 때 놓쳤으면 정말 후회했을 뻔한 레릭 박물관. 고골 박물관에서 헤매면서 알렉산드르 아저씨와 인연이 닿지 않았더라면 레릭 박물관을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아저씨는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델리에서 힌디어와 산스크리트어를 전공하고 인도에서 15년 간 생활했던 인도어학자로, 현재 모스크바 소재 레릭 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다. 상상해온 전형적인 러시아인이었다. (회청색 눈동자가 유난히 깊고 진지하고 차분하며 일단 이야기를 시작하면 속이야기를 아끼지 않는) 레릭은 영미권에서는 주로 Nicholas Roerich으로 알려져 있고 히말라야 설산과 생각에 잠긴 수도사를 많이 그렸다. 레릭이 사용하는 푸른색과 히말라야의 부드러운 질감을 사랑한다. 이번에 돌아..
자서전의 백미라는 찬사가 딱 어울리는 책이다.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이 어린 시절과 관심사와 정치적 신념을 담담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뛰어난 지성과 날카로운 비판 정신을 가졌으면서도 겸손한 태도로 낮은 곳에 임하고자 하는 고상한 인격이, 문장 문장마다 찻잎 우리듯 은근히 배어나온다. 2010년에 타인의 고통과 동정심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집착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 읽은 손유경 선생님의 《고통과 동정》이라는 책에서 크로포트킨과 상호부조론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여름 모스크바 여행 때 크로포트킨스카야 역에 자주 출몰하다가,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이젠 직접 크로포트킨 저서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돌아오자마자 빌린 책. 읽다 보니 니힐리즘에 대해 언급이 나온다. 인습, 권위주의, 전제정치, 미신..
푸쉬킨 작품 중에 읽어본 것이 예브게니 오네긴 뿐이어서,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마자 민음사판 푸쉬킨 선집을 빌렸다. 전권을 다 읽진 않고 몇 작품만 발췌독. 먼저 〈보리스 고두노프〉. 죽은 줄 알았던 황자가 두 번이나 살아 돌아와 나라가 뒤집어진 동란시대를 그렸다. 여러 이설이 있기는 하나,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위 계승자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보리스의 치세에 자연재해가 계속되어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수도승 하나가 승복을 벗고 황제의 의관을 입기로 마음 먹는다. 보리스가 죽이려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황자가 바로 자신임을 주장하던 그는, 마침내 보리스의 아들을 죽이고 황제가 된다. 그렇지만 그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또 다른 찬탈자에게 황위를 넘..
3년 전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시절 자주 들었던 질문이 "너는 무슨 민족이야?(你是什么民族?)"이다. 중국은 '중화 56개 민족'이라고 엄밀하게 구획해서 관리하고 있고, 개개인의 신분증에 민족성을 표시한다. 그냥 대충 한민족은 한국인이고 한국인은 한민족인 줄 아는 그런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중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참으로 중국적인 질문이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어 수업을 들으면서는 신장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회족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보통 부모님 중 하나는 한족, 나머지 하나는 회족인데 회족 정체성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학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성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행정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
처음 읽은 톨스토이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 몇몇은 대학생 때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읽어 내렸다. 이번 톨스토이 장편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가는 시점에 읽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둘다 참 절묘한 시기에 만난 것 같다. ▲ 이반 크람스코이 작 ‘미지의 여인’.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묘한 아우라와 함께 걸려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이반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화가 미하일로프의 실제 모델이 이반 크람스코이. 미하일로프는 안나와 브론스키가 이탈리아 생활을 하던 중에 만난 화가로, 그는 작중에서 안나에게 초상화를 한 점 그려 준다. 톨스토이가 미하일로프를 통해 바라..
일리야 레핀, 자포로지예 카자흐 크게 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에서 본 것 중에 어마어마한 아우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지금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이다. 비율이나 해상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도저히 다른 그림으로 바꿀 수가 없을 지경. 카자흐 아저씨들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름들이 참 구성지고 웃음에 호쾌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것이 박진감이 넘친다. 이 자포로지예 카자흐(페이지 내에서 '자포로제' 검색)들은 지금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드네프르강 하류 지역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술탄 메흐메트 4세가 자꾸 자기네한테 머릴 조아리라고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한다. 아재들이 그걸 받아보고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나머지, 갖은 욕설을 정성스레 쓸어담아 답장 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