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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 7개의 도시》를 재밌게 읽고 곧 반납하기 직전이다. 정보가 꽉찬 책이라 뭐라도 메모를 좀 해놓고 싶다. 누란, 쿠차, 투르판, 사마르칸드, 장안, 둔황, 호탄 7개의 도시에 대한 저술인데, 그중 쿠차 챕터에서 토하리어에 대해 기존의 그 어느 책보다 자세히 나와있어서 베껴 적어둔다. 이 내용을 책 없이 스스로 읊을 수 있을 만큼 내공이 된다면 좋겠지만 아직 턱도 없으니, 일단 옮겨적고 사진을 좀 추가했다. *** 쿠마라지바는 재능이 특별히 뛰어난 언어학자였다. 여느 쿠차 주민들처럼 쿠마라지바도 여러 중앙아시아 언어에 정통했다. 쿠차어, 중국어, 산스크리트어, 간다라어는 물론, 아마도 동부 토하리어(Agnean), 소그드어도 알았을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니아의 이주민들과 ..
사람의 발길이 닿을 것 같지 않은 동쪽 신장 한구석에 있었던 크로라이나(누란) 왕국에 대한 얘기다. 그곳을 오렐 스타인이라는 헝가리 태생 영국 고고학자가 탐험했다. 스벤 헤딘이라는 스웨덴 탐험가가 서양인으로서 이곳을 탐험하고 측량한 이후 스타인이 뒤따라가 갖은 유물을 발굴해냈다. 1901년 오렐 스타인이 니아 유적지 근처에 당도했을 때 낙타 몰이꾼이 목판 두 장을 가져왔다. 목판은 3~4세기 인도어 방언과 관련이 있는 카로슈티 문자로 적혀있었다. 이 목판은 실크로드가 언어, 종교, 문화의 전파에 더없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이 니아 유적지와 그 근처는 크로라이나(선선국)라는 소규모 오아시스 왕국의 영역이었다. 크로라이나 왕국은 기원후 200년에서 400년 사이에 번성했는데, 왕국 영..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사적 소유·국가의 기원》 0. 기본 개념 사적 유물론 -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생산 관계의 변천이 역사 발전을 좌우한다 루이스 헨리 모건 《고대사회》의 친족체계론 1. 사회 단계 - 야만(barbarism): 자연 산물을 획득. 인간 생산물은 획득을 위한 보조 도구 - 미개(savage): 목축·농경. 인간 활동을 통해 자연 산물의 생산을 증대 - 문명(civilization): 공업과 기술을 통해 자연 산물을 가공 2. 가족제도의 역사적 변천 (1) 군혼 무규율적 성교. 짝짓기 대상에 제한이 없다. 아버지는 불명확하나 어머니는 명확하다. 모계만 인정되는 모권제 사회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에도 나오는 초야권은 바로 이 군혼의 잔재다. (2) 혈연 가족 선후대 간..
브로니슬라프 말리노프스키, 《미개 사회의 범죄와 관습》(참여관찰과 기능주의로 얻은 '원시법'의 이해) 1. 호혜성과 전시성의 원리 말리노프스키 이전의 인류학 연구에 따르면 원주민 사회의 법체계에는 금기 위반을 제재하는 형법만이 존재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이를 본격 반박했다. 그는 트로브리앤드 군도에서 본격적인 참여관찰을 수행한 결과, 원주민 사회에도 서구의 민법에 해당하는 유연하고도 구속력 있는 의무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였다. 이 의무는 호혜성(reciprocity)과 전시성(publicity)이라는 적극적 원리에 지배받는다. 쉽게 말해 서로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그 티를 팍팍 내서 자신의 체면과 권위를 세워야 한다는 원리다. 물론 원시 사회에도 터부, 금지 등의 부정적이고 소극적 성격을 띠는 형법이 존재..
1. IS가 이라크에서 처음 나타난 이유 이라크전 이후 사담 후세인 정권(수니파)이 무너지고 누리 알 말리키 정권(시아파)으로 교체되었다. 알 말리키 정권은 부패지수가 높고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며 수니파를 탄압하는 한편 미국의 비호를 받고 있다. 이러한 알 말리키 정권에 배척당한 후세인 잔당이 IS 지도부로 합류하였다. 후세인 시기 집권당인 바트당은 범아랍권 통일, 아랍사회주의 및 반서구 반식민의 기치를 내건 집단으로 IS와 기본 성향이 비슷하다. 요약: 알 말리키 정권의 무능과 종파 갈등 2. 미국 중동 정책의 명분과 결과 * 1990-91 걸프 전쟁 (이라크-쿠웨이트 전쟁) 명분: 이라크의 부당한 쿠웨이트 침략에 대한 UN 집단안보 행사 결과: 미국의 중동 석유시장 헤게모니 장악, 사우디 친미화 * ..
최근에 처음 기항한 어느 항구의 대리점에다가 하역 작업을 빨리 하라고 재촉을 한 적이 있다. 물론 그 다음 기항지의 선적 기일을 맞추라고 각처에서 독촉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대리점은 갖은 노력을 해서 사전 작업을 훌륭하게 해놓았고 밤을 새가며 믿기 어려울 정도의 짧은 시간 안에 일을 마쳐 놓았다. 그런데 막상 하역비 인보이스를 받아서 상사에게 보였더니 할인을 받아야겠다며 돈을 보내주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일을 재촉한 입장으로서 고마운 마음이 있는데, 이제 와서 후려치기식 할인을 요구하자니 마음이 안 좋았다. 게다가 협상에서 괜히 우위를 내어줄까 봐 최소한의 인간적인 감사표시를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손익을 생각하는 사측 의견을 앞세우며 대리점의 노고를 의도치 않게 깎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항구에서 오..
하늘은 행복이란 자리를 대신해서 일상의 생활을 우리에게 내려 보내셨어. 예브게니 오네긴을 오페라로 처음 봤을 때 이 부분에서 눈물 그렁그렁 맺혔다... 엄청나게 장대한 순간을 포착하는 일반적인 오페라와는 달리, 일상을 담담히 살아 나가는 여자의 이야기라 더더욱 깊이 울렸음. 뭐든 익숙해지니 안정감은 있지만 지겨워 죽겠다...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근육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음. 평범한 일상을 담담히 밀고 나가는 꾸준한 사람들이 제일 존경스러운 요즘이다. ~_~ 마무리는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졸업 축사 "이것은 물이다" 마지막 부분.
서역 실크로드에 대한 관심은 마치 줄줄이 알사탕 같은 것이었다. 굳이 작정하고 찾아다닌 것이 아닌데도 가는 곳마다 실크로드가 딸려왔던 지난 6년이었다. 나는 2011년 9월부터 2012년 7월까지 베이징 중앙민족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공부했다. 호기심에 들은 위구르어 입문 수업이 계기가 되어 베이징에서 48시간 입석 기차를 타고 우루무치로 떠나게 되었다. 그 겨울은 통째로 우루무치, 투루판, 하미, 란저우, 자위관, 둔황, 인촨, 간난 티베트자치주, 시안 같은 실크로드 지역에서 보냈다. 그곳에는 눈앞에 아무 것도 막아서는 게 없는 광막한 사막이 있었다. 건조한 기후에 다리살은 갈라지고, 주먹만한 양꼬치를 먹다 보면 고기가 쐐기처럼 앞니에 끼곤 했다. 하루 종일 꼬박 사막길을 걸으면 다음날 골반 전체가 얼얼..
맹자가 말했다. "화살 만드는 사람이 어찌 갑옷 만드는 사람보다 어질지 못하리오? 그러나 화살 만드는 사람은 행여 사람을 다치게 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하고 갑옷 만드는 사람은 행여 사람을 다치게 할까 봐 두려워한다. 무당이나 장의사 또한 그러하다. 그러므로 기술을 선택할 적에 삼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맹자가 말했다. "백이는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않았고, 벗할 만한 사람이 아니면 벗하지 않았으며, 악한 사람의 조정에 서지 않았고, 악한 사람과 더불어 말하지 않았다. 악한 사람의 조정에 서고 악한 사람과 말하는 것을 마치 조복[관복]과 조관[관모]을 갖춘 채 도탄에 빠져 있는 것처럼 여겼다. 악을 싫어하는 마음으로 미루어보건대, 비루한 사람과 있을 때 그 사람의 갓이 바르지 않으면 ..
바야돌리드 논쟁 (Valladolid Debate)은 매우 흥미로운 논쟁으로 유럽사 최초의 인권 재판이다. 아메리카 인디언도 인간인지, 유럽인이 인디오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지에 대한 쟁론이다. 1550-1551 사이의 대항해시대에 에스파냐의 바야돌리드에서 실제 벌어졌던 사건이다. 바야돌리드 논쟁은 후안 세뿔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와 바르톨로메 라스 까사스(Bartolomé de las Casas) 사이의 경합이었다. 세뿔베다는 인디오를 야만인으로 보았다. 그래서 서구인들이 무력 개입을 해서 카톨릭을 전파하고 미개한 관습을 끝장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라스 까사스는 인디오도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폭력과 악행이 아닌 설득과 가르침으로 교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스파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