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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올해 여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 때 발견한 낙서들. 두번째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8시부터 밖에 나갔었다. 그때 표트르 대제에게 인사하러 가다가 봤다. "백인들을 위한 러시아" "인종주의" "루시인들을 위한 러시아" "사랑은 희어야 한다. 이 벤치처럼." 이건 첫번째 단어가 뭔가의 약자이다. 아는 분한테 여쭤보니 뒤의 두 단어는 "흑인들을 처먹어라"라는 뜻이란다... 러시아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스킨헤드 없냐고 걱정을 많이 해준다. 나는 밤늦게도 많이 나다녔지만 스킨헤드 같은 것은 한번도 보지 못했고 무서운 느낌도 전혀 안 들었는데, 새하얀 벤치에 이렇게 떡하니 인종주의 멘트가 적혀있는걸 보니 갑자기 좀 낯설게 느껴지기는 했다. 저곳도 삶이 팍팍한 거로구나, 생각했다. 이날 알렉산드르 아저씨가 가르쳐..
제9장: 메이지 초기의 대외관계와 청일전쟁 1894년 발발한 청일전쟁의 직접적 계기는 조선의 동학농민전쟁 발발이었다. 조선 정부는 동학전쟁 진압을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했는데, 일본은 톈진조약의 동시출병 조항을 근거로 즉시 파병하여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하였다. 이어서 청의 북양함대를 완전히 궤멸시키는 등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점한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점령하기에 이르자 청은 직예총독이자 북양대신인 이홍장으로 하여금 대일 회담에 임하게 한다. 이 협상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는 일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조약이었다. 우선 청은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이는 전통적인 동아시아 조공질서의 와해를 의미하는 동시에 일본의 대조선 영향력이 확대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청은..
제5장: 통일정권의 수립과 위로부터의 근대화 메이지유신 직후 번사 출신 도막파 인사들에 의해 중앙집권화가 급속히 진행되었다. 도막파가 주도한 신정부는 1871년 폐번치현을 강행하여 정치권력을 중앙으로 집중시켰다. 이와 동시에 도막파 공경이나 다이묘들이 점차 정부 요직에서 배제되고 사쓰마, 조슈 출신의 번사들이 권력을 독점했다. 1873년 정한논쟁 이후에 성립된 오오쿠보 도시미치 정권은 그 정점에 있었다. 유신 직후 도막파와 공의정체파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도막파의 중심인 사쓰마와 조슈는 막부 폐지에 그치지 않고 도쿠가와가의 세력을 대폭 축소하여 신정부에서 배제하고자 했다. 반면 삼직회의의 다수를 장악한 토사, 에치젠, 오와리, 아키의 공의정체파는 쇼군을 포함한 웅번연합정체를 지지했으며 도쿠가와 가문과 번..
제3장: 하급무사에서 '지사'로 사쓰마와 조슈 등 웅번의 하급 무사들은 존왕양이 및 도막운동 노선을 형성함으로써 점차적으로 번정부를 장악하였다. 이처럼 도쿠가와 체제의 주변부에 속했던 하급 무사는 어떻게 새로운 정치체제 구축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는가? 존왕양이론은 도쿠가와 후기 미토번에서 성장한 존왕론의 영향을 받아 쇄국체제의 유지를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특히 1858년 이이 나오스케의 통상조약 체결에 대해 코오메이 천황과 미토번주인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강하게 반발한 것을 계기로 막부비판 논리로 자리잡았다. 교토에서는 천황과 양이파 공경들이 막부를 비판했으며, 다이묘 중에는 히토츠바시파 인사들이 항의했다. 지방에서는 조슈번과 미토번이 양이론을 번의 공식입장으로 채택했다. 일부 무사 중에서도 조슈번의 요..
제1장: 페리 내항과 막부의 개국정책 1853년 페리 함대(흑선)가 에도 앞바다에 나타나 무력시위를 벌인 이듬해, 미국과 일본은 미일화친조약(카나가와조약)을 체결한다. 1858년에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조인되면서 개항장이 카나가와, 하코다테, 니가타, 효고, 나가사키의 5개로 늘어난다. 에도와 오사카는 개시장으로 정해졌으며, 에도에는 공사, 개항장에는 영사 주재를 허용하게 되었다. 외교대표의 국내여행과 외국인의 개항장 거류 및 개시장 체재 역시 허용된다. 경제적으로는 자유무역이 시행되었으며, 협정관세를 채택하고 외국화폐가 자유로이 유통되기 시작했다. 특히 영사재판권, 협정관세율, 편무적 최혜국대우 등의 불평등한 규정이 성문화된다. 이처럼 막부는 미국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2차례에 걸쳐 개국조약을 통해 ..
베를린에 도착한 첫날 박물관섬을 둘러보면서 발견한 낙서들입니다. 고금의 쟁쟁한 명사들이 남긴 말이네요. 독일어를 모르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유명한 베를린 낙서들을 처음 보니 독일에 온 것이 실감이 나서 기뻤습니다. 언젠가 꼭 다시 돌아갈 생각인데, 그때는 독일어 낙서들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Die zeit verlängert sich für alle, die sie zu nutzen verstehen. Time is extended for those who know how to use it. 시간은 그것을 쓸 줄 아는 사람들을 위해 확장된다. - 레오나르도 다 빈치 Es gibt kein genie ohne eine beimischung von wahnsinn..
책상 정리하다가 2011년 1학기에 메모해둔 것들이 나왔다. 이때는 중국 교환학생 나가기 직전으로, 교생실습을 나갔었고 지겨운 교직 및 전필 과목을 한껏 몰아 들었다. 과목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어서 수업시간마다 딴 책을 탐독하면서 종이에 베껴 적거나 하며 버티곤 했다. 그때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관련 책에서 옮겨 적은 내용인데, 앙드레 지드의 저작으로 기억한다. 나는 확실히 양가성이라는 주제에 매우 이끌린다. 처음으로 읽으면서 전율한 책도 Fair is foul, foul is fair로 유명한 맥베스였다. 최초로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던 도시인 홍콩도 동양과 서양이, 그리고 보편과 로컬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투쟁하며 한편으로 어우러져 있는 곳이다. 러시아는 쌍두독수리로 상징될 만큼 유럽과 아시아 그 모두이자..
베를린 갈 때 제일 기대했던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여기로 나폴레옹도 입성하고 히틀러도 진군하고 소련 홍군도 깃발을 내걸었다. 독일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첫날 저녁에 박물관섬을 둘러보고서 운터 덴 린덴 거리를 따라 걷다가 저 앞에 브란덴부르크 게이트 야경이 딱 나타났을 때의 감격이란...! 바로 요것이 소련 홍군이 베를린을 함락시키고서 브란덴부르크 게이트에 깃발을 내거는 모습이다. 제국의회 의사당에 깃발 꽂는 사진도 아주 유명한데 그건 언젠가 다음 포스팅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요것은 모스크바 승리공원(Парк Победы) 대조국전쟁 박물관에 있는 이미지. 깃발에 빨간색이 들어가 있다. 역시 대조국전쟁 박물관에 있는 기념 메달. 줄무늬를 보니까 성 게오르기 훈장 무늬인데 밀덕이 아니라서 자세..
2009년에 성의 철학과 성윤리라는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동성애, 성매매, 결혼, 사랑과 성 등의 주제를 다루는 수업이었는데 별로 유익한 기억으로 남아있지 않다. 특정한 계기가 최근 있었던지라, 요즘 들어 새삼 되새겨보고 있다. 수업을 들은 목적은 성매매에 대해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여성과 법, 그리고 인권, NGO, 세계시민사회 수업도 들었고, 페미니즘 관련서도 챙겨 읽었었다. 그 모든 것의 연장선상에서 선택했던 수업이다. 다른 주제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없는 편이었지만 성매매 부분만은 끝까지 입장정리가 어려웠다. 섹슈얼리티의 상품화를 윤리적으로 반대하는 전통적 입장과, 성판매 종사자의 직업 선택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급진적 입장 사이에서 좌표를 설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생각 정립에 도움을..
베를린의 한국문화원은 베를린 중심지인 포츠다머 플라츠 근처에 있다. 도시 곳곳에 이렇게 그래피티가 그려진 옛 베를린 장벽터가 남아있다. 이 장벽터는 한국문화원 바로 맞은편에 있다. 베를린 장벽이 지나갔던 자리 바로 위에 한국문화원을 설립하여, 통일에 대한 염원뿐만 아니라 독일과 한국 사이의 역사적 유사성을 공간적으로 표현했다. 문화원에서 한국어 수업 듣는 친구를 기다렸다. 밖에 나갈 수도 있었지만 근처의 웬만한 관광지는 다 본 관계로 도서실에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생각보다 이런저런 책이 많아서 뒤져보았는데 웬걸. 초등학교 1, 2학년 때 읽었던 어린이용 파우스트가 있지 않겠는가! 그때는 아버지 근무지 발령 관계로 1년 반 동안 경북 의성에 살았었다. 집 바로 가까이에 아늑한 어린이 도서관이 있어 자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