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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푸쉬킨 작품 중에 읽어본 것이 예브게니 오네긴 뿐이어서, 여름에 모스크바에서 돌아오자마자 민음사판 푸쉬킨 선집을 빌렸다. 전권을 다 읽진 않고 몇 작품만 발췌독. 먼저 〈보리스 고두노프〉. 죽은 줄 알았던 황자가 두 번이나 살아 돌아와 나라가 뒤집어진 동란시대를 그렸다. 여러 이설이 있기는 하나, 보리스 고두노프는 황위 계승자를 죽이고 제위에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보리스의 치세에 자연재해가 계속되어 민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수도승 하나가 승복을 벗고 황제의 의관을 입기로 마음 먹는다. 보리스가 죽이려 했지만 죽지 않고 살아남은 황자가 바로 자신임을 주장하던 그는, 마침내 보리스의 아들을 죽이고 황제가 된다. 그렇지만 그 역시 똑같은 방법으로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또 다른 찬탈자에게 황위를 넘..
3년 전 중국 중앙민족대학에서 교환학생으로 있던 시절 자주 들었던 질문이 "너는 무슨 민족이야?(你是什么民族?)"이다. 중국은 '중화 56개 민족'이라고 엄밀하게 구획해서 관리하고 있고, 개개인의 신분증에 민족성을 표시한다. 그냥 대충 한민족은 한국인이고 한국인은 한민족인 줄 아는 그런 나라에 사는 나로서는 굉장히 신선한, 중국에서나 들을 수 있는 참으로 중국적인 질문이었다. 그곳에서 위구르어 수업을 들으면서는 신장에서 온 친구들을 많이 보았다. 회족 학생들이 꽤 많이 있었다. 보통 부모님 중 하나는 한족, 나머지 하나는 회족인데 회족 정체성을 택한 경우가 많았다. 대학 입학이나 공무원 시험에서 가산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에서는 여러 민족성이 뚜렷하게 구별되어 행정적으로 관리가 되고 있..
처음 읽은 톨스토이 대장편 안나 카레니나. 도스토예프스키 장편 몇몇은 대학생 때 심장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읽어 내렸다. 이번 톨스토이 장편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나가는 시점에 읽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 둘다 참 절묘한 시기에 만난 것 같다. ▲ 이반 크람스코이 작 ‘미지의 여인’. 모스크바 트레차코프 갤러리에 묘한 아우라와 함께 걸려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초상화로 추정되는 그림이다. 이반 크람스코이와 톨스토이는 서로 아는 사이였는데, 《안나 카레니나》에 등장하는 화가 미하일로프의 실제 모델이 이반 크람스코이. 미하일로프는 안나와 브론스키가 이탈리아 생활을 하던 중에 만난 화가로, 그는 작중에서 안나에게 초상화를 한 점 그려 준다. 톨스토이가 미하일로프를 통해 바라..
일리야 레핀, 자포로지예 카자흐 크게 보기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박물관에서 본 것 중에 어마어마한 아우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지금 회사 컴퓨터 바탕화면이다. 비율이나 해상도가 절묘하게 맞아떨어져서 도저히 다른 그림으로 바꿀 수가 없을 지경. 카자흐 아저씨들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주름들이 참 구성지고 웃음에 호쾌함이 뚝뚝 묻어 나오는 것이 박진감이 넘친다. 이 자포로지예 카자흐(페이지 내에서 '자포로제' 검색)들은 지금 우크라이나에 속하는 드네프르강 하류 지역에 살았는데, 이곳에서 오스만 투르크를 무찔렀음에도 불구하고 술탄 메흐메트 4세가 자꾸 자기네한테 머릴 조아리라고 최후 통첩을 보내왔다 한다. 아재들이 그걸 받아보고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 나머지, 갖은 욕설을 정성스레 쓸어담아 답장 쓰는..
니콜라이 게, 무엇이 진리인가 (Н.Н.Ге. «Что есть истина?»,1890 г.) 어마어마한 아우라로 가득찼던 트레차코프 갤러리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기운을 내뿜던 그림.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한 유대 총독 빌라도와 예수를 공간배치, 명암, 체구와 의상 등 모든 면에서 완벽히 대조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두 손이 뒤로 결박된 채 쓸쓸히 서있는 예수의 모습. 보고서 왠지 모르게 이반, 알렉세이 카라마조프 형제의 이미지가 강렬히 떠올랐다. 대심문관 이야기도 생각났다.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아옥석지모탕구도 (阿玉錫持矛蕩寇圖, 아유시가 창을 들고 적을 소탕하다) 아주 오랫동안 랩탑 바탕화면이었고 언제든 다시 바탕화면으로 걸어놓고 싶은 그림. 심지어 사이즈도 딱 맞음. 그림의 모든 부분에 역동성이 가득하다. 말은 금방이라도 튀어오를 것 같고, 기다란 창은 곧장 앞으로 내다꽂힐 것 같다. 차분한 단순함 속에 더없는 생동감이 깃들어 있다. 청조 건륭연간 제일가는 궁정 화가였던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 칼미크 출신 아유시(한자로 음역한 것이 바로 아옥석)가 병사들을 이끌고 준가르 수령 다와치를 생포하자, 건륭제가 그 공적을 기려 카스틸리오네에게 초상을 그리게 한 것이 바로 이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오이라트 준가르라 하면 갈단, 아무르사나, 다와치 이야기 다 흥미진진 그 자..
Alexei Sundukov, Queue 역시 상트 페테르부르크 러시아 박물관 소재. 내겐 러시아 박물관의 강렬한 첫인상이었던 바로 그 그림. 소실점이 화면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아주 특이한 구도로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는다. 뭐든 구하려면 한없이 줄을 서서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했다는 소비에트 시대 생활상을 한큐에 보여주고 있다. 이덕형 교수의 《빛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 읽으면서 이 줄서기와 관련된 재밌는 부분 인용해 본다. "일단 줄부터 서고 보자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햄버거를 사 먹었는지는 모르겠지만 90년대 초 여름 어느 날, 나는 햄버거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에 섞여 있었다. 내 앞의 젊은 남자 하나가 기다리는 것이 짜증스러웠는지 계속 투덜거리더니 러시아를 이 지경으로 만든 고르바초프를 때..
일리야 레핀,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 크게 보기 이번 여름 상트 페테르부르크 루스끼 무제이에서 직접 보고 얼어붙을 뻔한 작품. 워낙 유명한 그림이다 보니 이미 역사책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는데, 원작의 아우라 앞에서는 문자 그대로 압도당해 버렸다. 루스끼 무제이 자체가 영기로 가득 찬 엄청난 박물관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기억에 남는다. 꼭 다시 보러 가고 싶다. ※ 직업상 남의 일 같지가 않은 그림이다 -_-
이 글은 제 예전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http://eagleoos.egloos.com/2293955 2012/03/22 18:47 이번 겨울에 간난장족(티베트)자치주 간자(甘加)향에 갔을 때 먼젓번에 포스팅한 바자오성뿐 아니라 한 군데를 더 들렀습니다. 원래 바자오성에 가는 게 목적이었고 전혀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에도 없었던 곳입니다. '번자오쓰'라는 곳입니다. '쓰'가 바로 절 사(寺)자이기에 불교 사원이겠거니 싶었습니다. 샤허의 라브랑 사원(拉卜楞寺)을 비롯한 허쭈어의 밀라레파 불각(米拉日巴佛阁)이 워낙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어, 이 사원에도 한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눈덮인 간자초원과 양떼들을 지나서 도착한 겨울의 번자오쓰는 무언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듯한 모습으로 고..
이 글은 제 예전 이글루스 블로그에서 옮겨왔음을 밝힙니다. http://eagleoos.egloos.com/2289210 2012/03/10 20:06 이번 겨울에 간쑤성 간난장족(티베트)자치주 샤허(夏河) 현에서 열린 친구 형의 결혼식에 초대받았었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샤허행이 확정됐다고 알려주었더니 친구가 재미있는 곳이 있다며 구글 위성지도를 뒤적이기 시작했습니다. 샤허현에 속한 간자(甘加)라는 마을에 신기한 유적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대체 이것은?! 잠깐 어안이 벙벙했다가 이내 무언가 연상이 되었습니다. 스타크래프트에나 나올 것 같은 요새. 그런데 알고 보니 이 희한한 생김새의 유적지는 정말 기지가 맞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자오성(八角城)이라는 중국 한나라 시대 요새를 조감하고 있습니다.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