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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 요새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래 전에 외교학 수업 들을 때 아 이런 천재도 있구나 + 정신없어 죽겠다, 라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삼제동맹이니 삼국동맹이니 재보장조약이니 으으 디테일은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하지만 저 모든 걸 거미줄 짜듯 구상해서 독일을 통일하고 프랑스를 한땀한땀 옭아매버린(!!) 신출귀몰한 외교가 비스마르크에 대해 경외감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차라리 행정은 하면 했지, 현실정치가나 외교관 같은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잘하지 못할 성격입니다. 기민하게 흐름을 읽고 정확하게 패를 가늠해서 상황상황에 맞게 타짜 기질을 발휘해야 하는 정치란... 천성적으로 너무 안 맞습니다. 그런 제게 원천적인 불능의 영역이나 다름없는 정치를 비스마르크는 저토록 아..
음식이라는 키워드로 러시아 문학 주요 작가와 작품을 살펴본 책이다. 챕터 1 '남의 음식'과 '나의 음식' 부분이 특히 탁월했다. 서구주의와 슬라브주의의 대결로 빚어진 러시아 문화의 이중성을 음식이라는 일상적 소재로 묘파했다. 이 부분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속 음식 이야기에 얽힌 푸쉬킨의 코스모폴리터니즘도 언급된다. 챕터 1을 읽는 내내 왜 러시아에 빠질 수밖에 없었는지, 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애착을 느끼게 됐는지 되새겨볼 수 있었다. 누군가 왜 러시아에 매력을 느끼냐고 묻는다면 이 부분을 그냥 펴주는 걸로 설명을 대체할 수 있을 만큼 정확히 핵심을 짚은 글이었다. 남의 것과 나의 것, 이중성, 혼종성 이 개념들은 내 관심분야 대부분과 취향과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다. 전공선택도 언어선택도 다 이것들이 작..
이번에 보로딘의 이고르 대공 보기 전에 워밍업으로 읽고 가려고 빌린 책. 글린카, 다르고미쉬스키, 발라키레프, 세자르 퀴, 보로딘, 무소르그스키 등 여섯 작곡가의 전기적인 사실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성된 책이다. 1980년도에 출판된 책이라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소설 읽듯이 술술 내려가는 재미가 있다. 보로딘은 과학자이기도 하고 음악가이기도 하면서 두 분야 모두에서 거대한 성취를 이뤘고, 성격도 온화하고 유머러스했으며 아내와의 관계도 좋았다. 진정한 사기캐릭터임을 알고 살짝 박탈감을 느꼈다. 그런데 정작 보로딘보다는 발라키레프에 관한 서술이 무척 흥미로웠다. 예전에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라는 책을 홀린 듯이 읽은 적이 있는데 옹정제랑 비슷한 점이 많은 캐릭터 같다. 드높은 기준, 완벽주의에서..
http://bravebird.tistory.com/96에서 서예가 치궁 할아부지를 간략히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사진 속 푸근한 인상이 보통이 아닌 건 알았지만, 중국 웹에 조금만 검색해 보아도 일화가 가득합니다. 인품, 인격, 귀여움, 유머 등등의 단어와 같이 엮어 검색하면 신문기사에 파워포인트 슬라이드에 커뮤니티 게시글까지 다양합니다. 그 중에 짧고 쉬운 것들을 몇 가지 소개합니다. 몇 주 전에 회사에서 막간을 이용해서 번역해 뒀었지요. 전 정말 이 할아부지 팬이 돼버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저런 천진함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2002년은 선생이 교편을 잡은 지 70년이 되는 해였다. 경축 행사 자리에서 베이징 사범대학 학생들이 곰돌이 푸 인형을 하나 선물했다. 회의 도중, 귀여워 못 참겠다는 듯이 ..
정말 좋은 책이다. 반납 전에 기억해 둘 만한 부분들을 필사해 뒀다. 더 많지만 귀퉁이를 접지 못해서 다 건지지 못했다. 그저 불평하고 반항하고 엇나가고만 싶은 소인배의 마음에 휘둘릴 때마다 다시 새겨 봐야겠다. 곧 제대해서 새 생활을 시작할 동생한테 한 권 선물해도 좋겠다. 참고로, 국제우주정거장에서 데이빗 보위의 Space Oddity를 녹화하여 유튜브에서 화제가 됐던 전직 캐나다 우주비행사 크리스 해드필드가 썼다! 처음 저 뮤직비디오를 봤을 때 데이빗 보위나 이 분에 대해서나 배경지식이 없었다. 합성인 줄 알고 끝까지 유심히 보지도 않았었지...ㅎㄷㄷ 저 충격적으로 멋진 곡을 실제로 우주에서 부르다니 낭만 그 자체! 그 뒤에 숨은 수십 년 간의 갖은 노력과 겸손히 정진하는 자세까지 들여다볼 수 있어..
"정열적이고 유유자적하며 겁이 없는 사람은 인생을 누릴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다."임어당 저, 김영수 편역, 《유머와 인생》, 도서출판 아이필드, 2003, p.165. 임어당 수필집 《유머와 인생》을 요즘 재밌게 읽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이라 가져와봤다. 유머감각 있는 사람들과 일하면 확실히 마음이 편하다. 이것저것 잘 베풀기도 하고 일할 때 재량권도 더 많이 허용해준다. 긴장상황도 웃음으로 식혀 주어 스트레스를 덜 받게 해준다. 그럴 수 있으려면 우선 정열적이어서 사람들에 대한 정이 있어야 한다. 과정에는 열심이되 결과에 대해서는 유유자적할 줄 알아야 한다. 한편, 남의 서슬에 퍼렇게 질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지킬 줄 아는 겁없는 성격이어야 한다. 이게 유머의 ..
중국인 이야기 1권 읽다가 자꾸 돌아가는 페이지가 있다. 바로 이 개구리인형 사진이 나온 페이지. 서예가 아이신 기오로 치궁 (爱新觉罗启功) 선생의 사진이다. 성씨가 매우 심상찮은데, 생각대로가 맞다. 청조 황실의 후손이다. 철혈의 독재군주이자 근면성실의 대명사로, 아마 일하다 과로사한 것으로 추정되는 제5대 황제 옹정제의 피를 이어받았다. 그래서일까 말년에는 옹정제의 잠저였던 옹화궁에 거처했다. 옹화궁은 이후 티베트불교 사원이 되었는데, 치궁 선생은 어릴 때 그곳에서 승려 교육도 받았다고 한다. 이 분은 인형을 유난히 좋아했다고 한다. 이 개구리 인형이 제일 친한 친구였고 외출할 때는 토끼 인형을 안고 다녔다. 황족 출신의 대서예가이자 국학대사로 존경받는 인물의 이다지도 천진한 모습이라니. 저 해맑은 ..
개구리와 올챙이 수묵화 2점. 원래 다른 사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담백하고 정감 있어서 오래 두고 보려고 가져왔다. 첫 번째는 치바이스의 작품이 맞고, 두 번째는 이름이나 인장이 선명히 보이진 않지만 치바이스 것은 아닌 것 같아 확실치 않다. 요즘 통근길에 중국인 이야기 1권 읽다가 중국 근현대 대화가들인 쉬베이훙과 치바이스의 미담에 감화되었다. 쉬베이훙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치바이스도 없었을지 모른다고 한다. 치바이스는 목수 출신 평민화가라 처음에는 그림의 가치가 전혀 인정받지 못했다. 쉬베이훙이 어느 날 한 전시회에서 구석에 걸려 있는 치바이스 그림을 발견했다. 즉시 직원을 불러다가 잘 보이는 곳에 걸게 하고 가격을 대폭 올려 적은 다음 쉬베이훙이 정한 가격이라고 쪽지를 붙여놓았다. 그 때부터 치..
푸쉬킨의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동란시대에 대해 다룬 희곡. 선악구도가 상당히 단순하다. 슈이스키와 가짜 드미트리 1세(본명 그리고리 오트레피예프, 본업 수도자)는 실존 인물이지만, 슈이스키의 딸인 크세니야와 그 연인 게오르기는 가상 인물이다. 크세니야를 강탈하려는 가짜 드미트리 1세의 악랄함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낸 인물 구도이다. 드미트리는 재고의 여지 없이 극악무도하고 크세니야는 더할 나위 없이 가련한 희생자여서 복잡다단한 심리드라마(예: 맥베스!!)를 보는 듯한 현대적 재미는 좀 떨어진다. 무대에 올리면 무대장치도 상당히 간소할 것 같다. 전투 장면 같은 것은 보여주기 방식이 아니라 말하기 방식으로 간단히 처리돼 있다. 폭력적인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았던 고전비극의 전형적인 작..
정독도서관 갔을 때 자서전 장르에 대한 신간이 나왔길래 빌려 읽고 있다. 서울대 불문과 교수 유호식 저. 제목 《자서전》. 자서전, 혹은 자기 이야기 장르에는 대학교 3학년 때 몹시 관심이 많았다. 그때쯤 자서전은 아니지만 자기 이야기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작품들인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도, 카뮈 《전락》도, 레르몬토프 《우리 시대의 영웅》도 열광하며 읽었었다. 자기의식이 강하고 유난히 예민했던 시기였다. 이청준의 〈자서전들 쓰십시다〉를 주제작으로, 《당신들의 천국》을 참고작으로 해서 이 주제로 학부 졸업논문을 쓰려고도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이 부분은 대학생활 한 시기의 거대한 주제였기에, 마지막 학기에 구직활동을 병행하며 대충 쓸 수밖에 없었던 졸업논문의 주제로 삼기에 켕기는 점이 많아 그..